3월, 새학기의 시작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인 올케의 출근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조카를 돌봐주던 외할머니가 개인적인 볼 일로 일주일 정도 집을 비웠기 때문이다. 결국 조카의 '임시돌보미'로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내가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차출됐다. 조카 '돌보미'로 보낸 일주일.
조카 돌보미 일주일, 실상은 이렇다
동생네 부부가 출근하는 오전 7시 30분에 동생네 집으로 가, 조카를 깨운 다음 씻기고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인다. 이 과정이 실제로 진행되는 데에는 수많은 장애물(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 불고, 세수 안 하겠다고 떼쓰기, 밥 안 먹고 TV 보겠다며 꼼짝 않기, 이 옷 저 옷 다 마음에 안 든다며 안 입겠다고 까탈부리기 등)을 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오전 9시 30분에 어린이집에 보낸 다음, 아이가 먹고 입느라 어질러진 집을 치운 후 우리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면 어느 새 11시. 아이와 함께 먹으면 되지 않냐고?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앉아서 젓가락, 숟가락질 하는 걸 포기해야 한다. 대충 국에 말아 숟가락으로 입에 퍼 넣어야지, 그것도 서서. TV 본다고, 장난감 갖고 논다며 돌아다니는 조카 하나 먹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니까.
오후 3시가 되면 조카를 찾으러 가야 한다.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면 이틀은 학원에 데리고 간다. 나머지 3일은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놀이시설이나 도서관에 데리고 간다. 집에서 놀면 된다고? 택도 없는 소리다. 연초에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 간 칼부림 사건이 있은 후로는 아래층 눈치가 보여 집에서 데리고 놀기도 힘들다. 네 살짜리 아이에게 아무리 '층간 소음' 문제에 대해 설명해도 이해할 리가 없다.
저녁 7시. 그나마 아이 엄마가 아빠보다 퇴근이 빠르다. 아이에게 아빠와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은 오긴 올까? 올케의 퇴근 이후에도 나의 돌봄노동은 쉴 수가 없다. 퇴근한 엄마가 씻고, 옷 갈아입고, 밥 먹을 때까지 조카 돌보미는 내 몫이다. 밤 9시가 다 돼서야 나의 돌봄노동은 겨우 끝이 난다. 더 놀다 가라는 조카와 올케의 말을 (못들은 척) 뒤로 한 채, 집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기진맥진이다.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뭐라도 해볼라치면 내일 걱정에 그냥 잠자리에 든다.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된 13여 시간의 돌봄노동자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어린이집 등원도우미에서 학원딜리버리가 생겨나기까지
조카 돌보미로 동생네 아파트를 드나들다 보니 게시판에 붙여진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 왔다. 옆 동에 사는 맞벌이 부부가 어린이집 등원 도우미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생네처럼 출근 시간이 이른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는 등원 도우미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아침 일찍 와주는 사람 자체가 없고, 시간 당 보수에 비해 아이를 매일 등원시켜야 하는 책임과 부담이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알아보니 아침 7시30분에서 9시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아이를 봐주고 등원시켜주는 등원도우미의 한 달 보수는 약 3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주로 같은 단지에 거주하는 가정주부나 할머니가 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나마 종일보육이 가능한 유아의 경우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방과후 교실이나 돌봄교실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학원으로 도는 이유다. 대치동에서는 '학원딜리버리(delivery)'라는 신종 부업까지 생겨났다. 아이가 하교한 후, 간식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고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공부도 봐주며 돌봐주는 일이다. 어린이집 '등원도우미'의 상급 버전이다.
'돌봄노동', 특히 아이의 양육과 보육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결혼유무, 국적 등 조건을 따질 여유도 없이, 닥치고 (누구에게든 맡아만 준다면) 맡겨야 할 현실이다. 어느 부모든 '아이 봐줄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거라 짐작해 본다. 그만큼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9시뉴스>에서 정부 정책 나와서야
지난 3월 13일 KBS <9시뉴스>에서는 서울시 서초구에서 시행 중인 '조모돌보미 지원사업'을 소개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뉴스의 골자는 조모나 외조모가 손주를 양육할 경우,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시간당 6000원 시급으로 지원금이 지급된다는 내용이다.
서초구가 2011년 7월부터 실시한 이 사업은 실제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지원 금액과 기간에 있어서는 부모의 맞벌이 여부, 자녀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아이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보모를, 노인에게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9시뉴스>에서 이를 보도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여성가족부는 '손주돌보미 지원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두 자녀 이상 양육하는 맞벌이 부부 가정을 대상으로 조모나 외조모가 일정 시간 교육을 받고 손주를 키울 경우 보육료 4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발표가 나자마자 국민들의 반응은 (여러 의미에서) 뜨거웠다. 맞벌이 부부는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높은 정책이라 반겼고, 이에 해당되지 않는 가정에선 좀 더 다수가 혜택볼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인 부정수급을 어떻게 방지할 것이며, 할머니 이외의 가족, 친척이 아이를 볼 경우를 제외시킨 이유의 타당성, 또 결국엔 '돌봄'을 가정과 여성에게 돌리는 후퇴한 정책이라는 지적 등 다양한 이유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재원 마련에 대한 근거 역시 제시하지 못했다.
이번 여성가족부의 '손주돌보미 지원사업' 발표에 대해 김은정 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보육인프라가 열악한 상황에서 맞벌이 육아가정을 위한 현실적 대안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부정수급, 허술한 가이드라인, 사회적 합의가 결여된 미숙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손주 보느라 할머니가 고생한다고 국가가 비용을 보조해 주는 정책보다는, 할머니까지 애 키우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게 국가가 할 일 아니겠냐"고 반문하며 "충분한 정책적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 시행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이 한 명을 '동네'가 함께 키우던 과거와 달리, 마을이 사라지고 동네가 파괴된 지금, 돌봄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부는 어떤 철학을 갖고 정책을 만들어야할지 신중을 기해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