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약 모로코에 있는 도시 어디서든 한복판에서 모함메드를 외친다면 수십 명의 남자가 멈춰 서서 "왜 불러?" 하며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혹시나 사기나 도난을 당했을 때 그의 길고 긴 풀 네임을 모른 채 모함메드로만 알고 있다면 범인 찾는 건 깨끗하게 포기하는 것이 좋다. 또한 당신이 적당한 제스처를 취하며 모함메드에 대해 물어본다면 누구든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함메드를 소개해 줄 것이다.
이슬람에서 찬양하는 예언자로 성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이름은 모로코 남자의 공용 이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인상부터 성실한 이미지를 풍긴 그의 이름 역시 모함메드였다. 카페트 가게에서 일하는 그는 나와 체코 여행자 다이애나를 동시에 집으로 초대했다. 카우치 서핑을 통해서다.
대서양의 청명한 바다와 거친 포말, 해안을 따라 이름 그대로 하얀 집들이 그림처럼 늘어서 있을 거라 상상되는 카사블랑카. 소설 <모두가 릭의 카페로 온다>를 각색한 추억의 로맨틱한 영화 <카사블랑카> 이미지를 생각하고 온다면 환상이 깨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하얀(블랑카) 집(카사)'이란 뜻이 무색하게 유감스럽게도 집 밖에만 나서면 온통 누렇게 변색된 텁텁한 느낌의 색감이 펼쳐진다. 전 세계 동급 최강의 스모그를 자랑하는 이곳은 10년 전 통계자료에 기록된 300만 인구가 혈관 속 박테리아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현재 800만 이상, 위성도시까지 1000만 이상의 거대한 매머드급 도시로 성장했다.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혼란과 혼탁의 거리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모함메드는 나와 다이애나를 위해 직접 카사블랑카 구경을 시켜주기로 했다. 그는 이곳만의 특색 있는 문화와 더불어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한편으론 언어사용과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최근 치안상황이 급속하게 나빠진 것도 그와 동행하는 이유가 되었다.
메디나의 재래시장...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제철 과일 눈요기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로컬문화를 경험하고, 기기묘묘한 물품들을 볼 수 있는 메디나(구시가지)의 바자르(재래시장)를 시작으로 모로코에서 가장 거대한 카사블랑카의 랜드마크 핫산 2세 모스크, 시원한 사우나를 위한 동네 작은 하맘(목욕탕) 순서로 발길을 옮기기로 했다.
모로코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카사블랑카 메디나는 꼬불꼬불한 미로를 헤매는 게 매력이다. 골목을 돌아 나올 때마다 구역별로 판매하는 물품이 정리되어 있는 바자르에서는 신선한 제철 과일 보는 눈요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맙소사, 2kg에 고작 1.5달러? 이게 말이 돼? 한국에서 체리나 멜론은 이제 부르주아 과일이 되었단 말이지! 이런, 복숭아랑 오렌지도 저렴하구만!"
"프라하도 마찬가지야. 과일이 비싸 마음껏 사먹을 수가 없어. 채식주의자에겐 점점 가혹한 환경이 되어가고 있어."락토 채식주의(생선이나 해물, 달걀 등 모든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고 우유, 유제품을 포함해 채식을 하는 경우)를 고집하는 다이애나는 저녁 때 먹을 요량으로 여러 종류의 과일을 낱개로 구입한다. 그녀는 2주간의 모로코 여행을 한 뒤 워크캠프를 통해 사막 마을에서 자원봉사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식사 대신 때때로 요구르트나 케이크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러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메가톤급' 수박을 발견했고, 흥정을 시도하지도 못한 채 완강한 상인의 페이스에 말려 정가 그대로 구입, 모함메드에게 감사의 표시로 선물했다. 그는 선물 받아 기뻐 웃는 건지, 무거워서 슬퍼 웃는 건지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결국 주인아저씨에게 나중에 찾아가기로 하고 표시만 해둔다.
'음란마귀'를 유발한 그녀... 내가 보디가드가 돼야 했다메디나를 돌아다니다 접근하기가 좀 어려운 안쪽 바자르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소재에 꽂히게 되었다. 옷도, 전자제품도, 예술품을 파는 곳도 아닌, 엄격하게 통제되는 분위기의 이곳은 동물 시장이다. 살아 있는 갖가지 동물은 물론, 좀체 구경하기 힘든 야생동물 박제까지 동물원이 따로 없었다.
이곳 사람들도 정력에 좋다는 것들을 챙기는지, 사냥한 동물을 이용한 각종 희귀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행여 불법 포획물은 없는지 모함메드에게 물었지만 그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주로 마니아들이 찾는 것들이기에 보통 사람들은 동물 시장에 별 흥미가 없단다. 물건을 구입하는 한해서만 사진촬영이 가능하단 얘길 듣고 그저 눈으로만 신기한 광경을 담아야 했다.
"헤나 하고 가세요. 30분이면 돼요. 예쁘게 그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마침 잘 됐다. 모로코에 오면 꼭 해보고 싶었는데."한 소녀가 다채로운 시장 풍경에 상기된 다이애나의 여심을 건드렸다. 유럽 특유의 무관심한 표정으로 지나칠 줄 알았던 그녀가 상냥한 얼굴로 소녀 앞에 앉아 기꺼이 다리를 맡긴다. 무슬림 국가에서 여성의 다리가 가감 없이 노출된다는 건 '음란마귀'를 유발하는 파격 중의 파격.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그리기 수월하게 무릎까지 치마를 걷어 올렸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곁눈질을 할 때마다 나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면 딴청부리며 고개를 돌리곤 한다. 금방 들킬 일을 왜…. 하긴 본능일 테다. 모함메드가 카페트 가게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라 내가 보디가드가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번 그리면 진한 빛깔로 며칠은 간다는 헤나는 문신이 부담스럽거나 자주 문양을 바꾸고 싶어하는 개성 넘치는 여성들에겐 매혹적인 패션 아이템이다. 소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염료를 찍어 정성껏 다이애나의 발에 수를 놓았고, 구경하던 내 팔에다가도 내 아랍 이름을 멋지게 장식해주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헤나 값 외에도 따로 팁까지 얹어주며 룰루랄라 대서양의 바다를 늠름하게 바라보고 있는 핫산 2세 모스크로 향했다.
'3단계 목욕탕'에 들뜬 나... 근데 왜 나를 훑어보는 거지?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하는 크기의 핫산 2세 모스크. 금요일도 아닌데 선선한 날씨 속에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기도하러 오는 이들도 많지만 오렌지 빛 조명이 어찌나 낭만적인지 나들이 나온 가족 단위는 물론 여기저기 데이트 나온 연인들도 부지기수다. 저녁에는 모스크 광장을 뛰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모스크가 또래 아이들과 놀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가 되기 때문에 녀석들은 종교를 딱딱하거나 무거운 교리가 아닌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모함메드와 우리는 대서양의 바닷바람을 잠시 쐰 뒤 하맘으로 향했다. 느긋하게 즐긴 뒤 입구에서 만나기로 다이애나와는 미리 시간을 정하고, 나와 모함메드는 남성용 하맘에 들어갔다. 하맘은 총 세 개의 목욕탕으로 나뉘는데 가장 바깥쪽에 온수와 냉수 수도꼭지가 있어 온도 조절을 하며 샤워할 수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워진다. 가장 안쪽은 보통 건식 사우나로 이용되는데 내게는 숨 쉬기가 고달플 정도의 난이도였다.
우린 티켓을 끊고, 각자 개인 물품을 보관할 바구니를 받았다. 오랜만에 묵은 때 좀 빼겠단 들뜬 마음이었을까. 성질머리 급한 난 빨리 들어가고픈 마음에 훌러덩 옷을 다 벗고 세면도구를 챙기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구석에서 차분히 탈의를 하던 모함메드가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옅은 떨림의 눈빛이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건 그로부터 3초 뒤였다.
때마침 목욕을 마친 후 개운한 표정으로 탈의실로 나오던 중년 남자도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싱겁게 훑어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인이 된 후 요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 남자와 나의 차이점을 인지하는 데는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 눈을 보며 웃던 모함메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건'"문, 있잖아, 팬티는 입어야 해."
"목욕하는 거 아냐? 때 민다며?"
"맞아, 그래도 팬티는 입고 하는 거야."모함메드의 배려 섞인 말투. 하지만 나는 이미, 아… 망했다. 1초의 정적이 1분같이 느껴지던 찰나, 사전 지식 없이 긴장 풀고 간 나의 치명적 실수에 괜히 공중에 하이킥이라도 날리고 싶을 뿐이었다. 다시 급하게 바구니를 뒤져 속옷을 입었지만 나의 '근원적 부끄러움(!)'은 이미 낱낱이 공개되고 난 뒤. 모함메드 역시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기에 나에게 미리 말하는 걸 깜빡한 것이다. 나는 세 곳의 탕을 차례로 옮겨가며 모함메드의 손을 빌려 밀린 때를 국수처럼 뽑고, 사우나를 통해 개운한 몸을 만들어냈다.
한 시간 뒤 만난 다이애나는 생경한 중동 문화에 꽤나 흡족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생생한 탕 경험담이 이어졌고, 우리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모함메드는 평소에도 과묵한 친구였는데. 나는 그것이 어쩌면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의 이야기 중간 중간 한 번씩 내 눈을 보며 피식 웃었고, 나는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적나라한 몹쓸 실체'를 본 기억으로 그런 것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현지인 아줌마가 때 밀어줬지 뭐야. 신기한 경험이었어. 어땠어, 문? 정말 좋았지?"
"응, 조…좋았지 그럼. 우리 기분도 상쾌한데 요구르트나 먹자."우리는 밤거리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요구르트를 떠먹고, 각자의 라이프 스토리를 나누며, 카사블랑카의 속살을 맛본 것에 대해 몹시 만족해한 채 밤늦도록 기분 좋게 피로를 풀었다. 요구르트 값은 내가 지불했다. 다만 밤의 정취가 좋아서였을 뿐, 숙녀에게 무언가 들키고 싫지 않다는 뜻이 담긴 '입막음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http://blog.naver.com/miracle_mate)에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