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현대차) 아산공장의 양회삼 부지회장은 10년 전인 2003년 3월 28일을 잊지 못합니다. 전날 그는 몇몇 젊은 노동자들과 유성기업 노조사무실에 모여 사내하청노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날, 공장에서 노조가입 원서를 돌리며 대공장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하청노조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가 일하던 세화산업을 비롯해 며칠 만에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울산과 전주공장으로 확대됐고,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정규직화에 대한 열망은 한껏 고양됐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쉽사리 불법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조 간부들의 대량 해고·검찰의 무혐의 처분·회사의 조직적인 회유와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0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 인정됐고 25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며 파업을 벌였지만 회사는 다시 대량해고와 징계로 응수했습니다. 그는 해고와 복직, 구속에 이어 2년째 해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됐습니다. 초등학생이던 두 딸은 대학생·고등학생이 됐고, 그의 나이도 이제 마흔아홉이 됐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식칼 테러' 사건군을 전역하고 부산에 있는 나이키 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그는 1998년 구제금융사태가 터지고, 공장이 베트남으로 옮기면서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아산으로 이사와 지인의 소개로 2001년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정규직인 줄 알고 들어갔지만, 그는 '세화산업'이라는 하청업체에 소속됐습니다.
그가 소나타 자동차에 무거운 라디에이터를 조립하면 맞은편에 있는 정규직은 다른 부분을 조립하며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규직이 아니었고, 쉴 틈도 없이 밤낮으로 일해도 100만 원을 벌지 못했습니다. 한두 달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2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세화산업에서 터진 '식칼 테러' 사건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2003년 3월 19일 양회삼 부지회장과 같이 일하던 송성훈(당시 31세)씨는 업체 사무실에 가서 월차를 쓰겠다고 하다가 관리자가 밀어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세화산업 관리자는 병원으로 찾아와 식칼로 송성훈의 아킬레스건을 그었습니다.
당시 양 부지회장은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술 한 잔 마시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송씨의 아킬레스건이 70% 정도 손상돼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은 그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굴지의 대기업 현대차에서 하청노동자는 기계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소나타 공장은 이틀 동안 멈췄고,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교섭 끝에 합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료들과 노조 건설을 준비했고, 세화산업의 업체 대표를 맡았습니다. 현대차라는 대기업에서 처음으로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순간을 생각하면 그는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아산 사내하청노조 이후 하청노조 전국으로 확산10년 전, 아산에서 시작한 대기업 하청노조의 불길은 울산과 전주로 옮겨붙었고, 현대중공업·하이닉스 청주공장·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기아차 화성공장·동희오토·기륭전자 등 전국에 타올랐습니다.
2004년 5월과 8월 노동부에 불법파견 집단 진정서를 제출해 그해 말까지 울산·아산·전주 공장 121개 사내하청 업체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현대차는 불법 사내하청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맞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라인을 세우고 철탑에 오르면서 싸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불법을 저지른 현대차 정몽구 회장과 관리자들은 아무도 구속되지 않았지만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은 32명이 구속되고, 45명이 수배생활을 했으며, 320명이 해고당했습니다.
2008년 경제위기를 이유로 현대차 울산·아산 공장에서 100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쫓겨났으며, 지금도 신차 생산·자동화·공정분리 등을 이유로 해고당하고 있습니다. 10주년이 되는 3월 28일, 현재 현대차 울산공장 송전탑에는 비정규직지회 천의봉 사무장과 대법원 판결 당사자인 최병승 조합원이 163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소나타는 전 세계로 팔려나갔지만...
반면 현대차는 1998년 외환위기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거 사용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외환위기를 핑계로 1998년부터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현장에 투입해 온갖 차별과 착취를 벌인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재산이 6800억 원에서 6조9600억 원으로 10배가 넘게 늘었습니다.
현대차의 매출액은 10년 전인 2003년 24조9000억 원에서 2012년 84조4000억 원으로 338% 증가했으며, 당기순이익은 2003년 1조6726억 원에서 2012년 9조563억 원으로 무려 541% 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파견 노동자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매년 1만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사용해 조직적으로 불법을 저질러온 정몽구 회장과 사용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현대차의 사내이사들은 매년 20억 원이 넘는 연봉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양회삼 부지회장이 10년 넘게 조립했던 라디에이터를 단 소나타는 전 세계로 팔려나가며 현대차에게 '떼돈'을 벌어다줬지만 그는 공장에서 쫓겨나 빚을 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습니다. 양회삼 부지회장보다 훨씬 나이 어린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불법파견으로 처벌받기는커녕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매년 200억 원이 넘는 돈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침묵하면 이뤄지는 건 하나도 없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조가 만들어지고, 현대차 불법파견에 맞서 사내하청을 폐지하라며 싸운 10년. 양회삼 부지회장은 해고자들에게 주어지는 몇십만 원의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대차가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2007년 6월 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처음으로 아산공장 하청노동자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현대차 정규직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은 2010년 7월 22일과 2012년 2월 23일 대법원 판결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는 정규직과 뒤섞여서 일하면 불법파견이고, 나뉘어져서 일하면 합법도급이라는 지난 19일 중앙노동위원회의 잘못된 판정도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차 아산공장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는 엔진서브 등 조립라인이 아닌 노동자도 불법파견이라고 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8개월째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하루속히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서울로 올라와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양회삼 부지회장은 무엇보다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워야 희망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수배되고, 해고되고, 철탑에 올라 싸웠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도 노동자들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싸우지 않고 침묵하는 이들에게 어떤 '떡고물'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자본에 맞서 '비정규직 없는 일터'를 위해 함께 싸워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0년 전 3월 28일 정규직노조가 나서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지원하고 연대했던 것처럼, 이제 정규직 활동가들이 나서서 함께 싸울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양회삼 부지회장과 현대차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3월 30일 오전 10시에 충남 온양에 있는 신리초등학교에서 10년 전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투쟁과 연대를 결의합니다. 노동조합 열 살을 맞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의는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박점규님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으로 전 금속노조 비정규국장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 <레디앙> <참세상>에도 송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