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얼마 전 경북의 한 자율형사립고에서 전교 1등을 했다는 고1 학생이 자살을 암시하면서 카카오톡으로 어머니에게 보낸 메시지다. 이 학생은 아파트 20층 옥상으로 걸어 올라가 옷과 신발, 휴대전화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고 언론은 전한다.
이 학생은 어머니에게 이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학생이 올라간 20층 아파트의 계단은 또 얼마나 멀었을까? 그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또 얼마나 아득했을까?2011년 12월 이후 대구 14명, 경북에서 12명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이게 비단 대구, 경북 지역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증명이라도 하듯 며칠 후에는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한 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다고 했을까, 라는 생각에 먹먹함이 앞선다. 이보다 현재 2013년 대한민국 학생들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문장이 있을까? 유언이 되어버린 이 카카오톡 메시지는 이 학생 뿐 아니라 대한민국 60만 수험생, 아니 900만 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읽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아이들의 유언은 이전에도 수없이 있었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흘려버리거나, 그때만 숙연했다가 다시 무감각해지고, 더 나아가 이를 남의 일로 치부하며 애써 귀를 막고 눈을 감아온 것이 우리 현실 아닌가?
3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있었던 우리 아이들의 절절한 외침을 보라. 이제 우리 어른들이, 기성 사회가 이 아이들의 단말마적 외침에 답해야 한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던 2002년 초등생의 마지막 일기"내가 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어른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린이가 어른보다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숙제가 태산 같다. 11장의 주말 과제, 14장의 수학 숙제, 난 그만 다니고 싶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2002년 학교와 학원을 전전해야 했던 천안의 한 초등학생이 죽음을 택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일기장의 내용이다. 그는 당시 11살밖에 되지 않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이 학생이 세상에 절규하면서 남긴 메시지를 당시엔 가슴 아파 했지만, 이내 잊었다. 그러면서 일제고사라는 괴물까지 만들어 초등학교끼리도 경쟁을 시키고 부정을 일삼게 했던 것이 우리 어른들이다.
지금 우리 어른들이 절절한 이 아이의 일기에 공감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이 일기는 당시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이와 같은, 또는 비슷한 환경에 처해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10년 전 이 초등학생의 절규를 벌써 잊은 듯하다.
아빠가 일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태산같은 숙제에 시달리고 있는 이 초등학생의 절규를 듣고도 "어른이 되어서 더 많이 쉬기 위해서 어릴 때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 거야"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널렸다. 아닌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6년 여고생의 유서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모순, 모순, 모순이다. 경쟁! 경쟁! 공부 공부...순수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멋들어진 사각모를 위해 잘나지도 않은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뭘 해...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1986년 1월, 15살의 한 여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다. 이 사건은 소설과 영화로도 나오고,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이 여학생은 전교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또 이 외침도 잊은 듯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그건 루저들의 비겁한 변명이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사회적 지위와 봉급은 성적순이다"라는 비아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교육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이보다 더 적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여학생은 "나는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30년이 지난 우리 사회의 학생들은 여전히 공부만 해야 하는 로봇, '공부 머신'이다(학생들은 기계라 하지 않고 머신이라고 표현한다).
세계 최장의 정규 학습시간도 모자라 세계 최장의 사교육 시간을 바치고도 우리 학생들은 "요즘 아이들 공부 안 해서 큰일이다"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세계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하면서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공부 안 해서 큰일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 고등학생들은 아침 7시에 교문을 들어서면 밤 11시에 교문을 나선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업을 마치면 집에 가라고 교문을 잠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집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교문을 잠근다. 밤 10시가 되어서도 불이 환하게 켜진 대한민국 교실 장면이 해외 토픽에 나왔니, 하는 것은 이제 뉴스 거리도 아니다.
지금이 18세기 산업혁명 시기도 아니고, 세상 어떤 직장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라고 하는가? 만약 이런 직장이 있다면 그 직장 계속 다닐 어른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것도 모자라 토요일, 일요일에도 학원, 과외에 시달려야 한다.
학생은 학생대로 너무 힘들고, 부모는 부모대로 사교육비에, 애들 뒷바라지에 등골이 휜다. 그런데 관성처럼, 다람쥐 쳇바퀴처럼 대한민국 교육은 오늘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아이들도 불행하고, 어른도 불행하고, 학교도 불행하고, 사회도 불행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자기를 학대해야 행복하다고 가르칠까? 우리 사회는 적어도 학교를 중심으로는 집단적 새디즘(sadism)에 걸린 것 같다.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데 그 불행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해 왔고, 내일도 이어질 것 같다.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전 사회적 반성이 필요한 때3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우리 학생들은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죽음으로 고발해 왔다.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다는 마지막 메시지는 결코 한 학생만의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2007년 142명, 2008년 137명, 2009년 202명, 2010년 146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했다. 또 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같은 기간 자살한 대학생은 232명, 332명, 249명, 230명이란다.
자살하는 학생이 해마다 400~500명, 하루 1.5명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다. 우리나라는 성인 자살률, 특히 노인자살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 세계 1위다. 이것도 모자랐는지 청소년 자살률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뒤집어 쓴 지 오래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1월 OECD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내놓은 'OECD 국가와 비교한 한국의 인구집단별 자살률 동향과 정책 제언' 보고서를 보면 2000~2010년 사이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 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자료에 의하면, OECD 31개국의 아동·청소년(10~24세)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000년 7.7명에서 2010년 6.5명으로 16% 감소했지만, 한국은 6.4명에서 9.4명으로 오히려 47%나 급증했다. OECD에서 2000년 18위였던 한국의 순위는 2010년 5위로 상승했고, 자살률의 상승폭은 칠레(52%)에 이어 세계 2위였다.
몇 년 전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로 우리 사회가 술렁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여고생의 유서, 2000년대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며 목을 맨 초등학생의 일기, 2010년 수재들만 모인다는 카이스트에 다니던 학생이 남긴 유서를 보면서 우리 사회는 무엇을 느꼈을까?
교육이란 이름으로 부끄러움을 잃다출세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대한민국 최고 갑부의 손자도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수천 만 원의 뒷돈을 주어서라도 물 좋은 국제중에 들어가야 한다. 국제적 능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자녀의 국적을 세탁한 후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으로 만들어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외국어 영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외국어고 학생들이 사법고시에 가장 많이 합격하고, 의대와 한의대 등에 많이 갔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오늘도 졸업식장이나 입학식장에는 어김없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몇 명이 합격했고, 의대, 한의대, 치대에 몇 명이 갔는지가 울려퍼진다. 이러고도 어른들, 더 정확하게는 위정자들과 기득권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렇게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입시지옥은 고등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범위를 확장했고, 무한경쟁의 지옥은 카이스트 대학생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최근 학교 폭력 문제로 교과부, 경찰청, 여성가족부 등 관련부서들이 합동으로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학교 폭력 문제, 이로 인한 자살 문제가 덜 중요하거나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 중 훨씬 많은 아이들,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적과 입시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학생 자살에 대해서 전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더 근본적으로 입시지옥의 문제, 학벌사회의 폐단에 대해서 전 사회적인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학생들이 하늘 같은 목숨을 버리며 우리 사회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에 우리 모두 숙연해 져야 한다. 당장 아무 것도 안 해도, 못 해도 좋다. 이제라도 우리 학생들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자. 30년 째 반복되고 있는 이 아이들의 단말마적 외침을 되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