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여먹거나 빵을 사먹으면 되지 굶긴 왜 굶어? 피자나 치킨, 자장면이나 탕수육을 시켜 먹어도 되는데…. 할머니는 그런 거 할 줄 몰랐어?"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할머니가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해서 밥을 해먹을 쌀이 없어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자가 보였다는 맹랑한 반응(해법)이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할머니가 살아온 세대를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지만 뭔가가 단절된 듯한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내가 리아까도 많이 끌었심미다. 목 수술로 했는데, 갑상선 수술(손으로 수술한 목을 어루만지며) 이만큼 이리 했는데, 전주 에스 병원에 가서, 그 하고 와 갖고 두 돌도 몬 돼서 리아까를 끌었어요. 끌었는데, 또 그것도 그리 했는데 또 병이 나 가지고 또 인자 맹장을 들어내고 그래도 또 리어카로 끌었심미다. 또 끄고, 또 삼, 사 년 이따가 또 자궁이 또 탈이 나서 다 들어내고, 그래도 또 리어카로 또 끌었스이. -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10> 67쪽막 그러고 막은개시 뭐시라 해샀고 못 나가게 해도. 아 그리 못 하겄더라고, 그러곤 인제 몸이 아주 딱 못 쓰게 되먼은. 기양 애기 낳고도 암쓰(아무렇지 않고) 기양 딱, 씻고 그러고 딱 해불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이렇게 용안서 선지떼기 같은 거 가 나버서 나오드만, 그런 거 한번쓱 나와. 그래도 기양 딱 차고, 기양 그러고 뭐 그러고 살았어, 산후조리 우, 안 해봤어. -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10> 389쪽앞글(67쪽)은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 동동에 살고 계시는 김진엽(1935년생) 할머니가 들려준 시집살이, 가난하고 고단하기만 했던 시절에 겪은 시집살이 중 한토막이다. 뒷글(389쪽)은 광주광역시 서구 쌍촌동에서 만난 나월순(1980년생) 할머니가 들려준 시집살이 이야기 중 일부분이다.
요즘 여학생들에게,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고도 리어카를 끌며 살아야 하는 시집살이를 했고, 출산 후 선지떼기 같은 것이 나와도 별다른 조치 없이 살았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짐을 옮길 게 있으면 용달차를 사고, 산후조리를 할 능력이 안 되면 애를 낳지 말거나 이혼하면 되지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며 사느냐' 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던 시절도 이젠 옛말이다. 이혼이 집안을 망신시키는 시대도 더 이상은 아니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함에도 시쳇말로 '시월드'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 여자들에게 있어 시집살이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굴레 아닌 굴레가 아닐까 생각된다.
10분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당신들의 시집살이 이야기'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신동흔 교수 외 23명이 쓰고 도서출판 박이정에서 출판한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10>는 2008년에 정부재원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과제 '시집살이 이야기 조사 연구-현지조사를 통한 시집살이 담 구술 자료의 집대성'의 결과물(자료집) 10권 중 10번째 자료집이다.
개별 구연자를 기본단위로 구성된 결과물은 현지조사를 통해 수집한 200여 명의 구연자가 들려주는 시집살이 이야기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109명의 구술 자료를 선별하여 주제유형별로 분류해 10권으로 수록하였는데, 10번째 자료집인 이 책은 '여성이라는 이름의 철학자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시집살이 이야기의 주인공 열 분 할머니, 연구조사에 응한 구연자들은 조사일을 기준으로 해 70대 초반에서 80세까지의 할머니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를 겪은 세대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고, 피난 보따리를 싸야했고, 시부모님들을 봉양하며 살아야 했던 대가족 속의 며느리였던 세대들이다.
사전적 의미의 시집살이는 '결혼한 여자가 시집에서 살면서 살림을 함'으로 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연상하는 시집살이는 고부간의 갈등으로 겪는 애환, 시누이나 시집 식구들 때문에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야 하는 새댁의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열 분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시집살이는 가슴 저리도록 구구절절하다. 가난한 시대, 여필종부와 삼종지도, 출가외인이라는 시대적 가치가 성성했던 시대를 아내, 며느리, 어머니로 살아오면서 감내하고 극복해야 했던 애환이자 고단함이 시집살이 자체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로 분류되고 있는 필자는 구경꾼의 눈으로나마 이런 며느리들을 삶을 보며 살았다. 90이 넘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이 그랬고, 칠순을 넘긴 큰누나의 시집살이가 그랬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해서는 안 되고, 귀가 있어도 들어서는 안 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말며 살아야 했던 세대가 책에 실린 할머니들이 건넌 새댁 시절, 며느리 세월이었을 게 분명하다. 늙고 병든 시부모의 병수발을 들고 눈멀고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아야 했던 며느리, 난봉꾼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주는 아내, 졸망졸망한 자식들 교육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게 할머니들이 살아야 했던 시집살이다.
모든 할머니들이 지지리 궁핍하고 눈물 나도록 힘들게 산 것은 아니다. 80이라는 나이지만 여학교(여고)를 졸업해 여고 동창생들과 여정을 디디고 있는 할머니의 구연은 부러움을 살만큼 '럭셔리한' 시집살이다. 시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이 들 만큼 고부 사이가 좋았던 새댁 시절을 보낸 할머니, 또래의 시누이와 자매처럼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시집살이는 달콤함이 느껴질 만큼 훈훈하다.
조사시간 너무 짧아 인스턴트 시집살이 같은 느낌 들어 41분 16초, 45분, 56분…. 조사자들이 할머니들을 만나 조사한 시간들이다. 열 분 할머니 중 3시간을 넘게 조사한 할머니가 한 분도 없다. 기억력 또한 새댁 시절 같지 않을 할머니들이 그 짧은 시간에 수십 년 세월을 떠올리며 구연하는 시집살이는 자칫 넋두리거나 한 섞인 푸념에 치우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감출수가 없다.
숭늉의 맛이 깊고 구수한 것은 서두르지 않고 은근히 우려내기 때문이다. 여건(시간, 인력, 연구비)의 제한 때문이겠지만 할머니들의 가슴을 하루나 이틀쯤에 걸쳐 열고 우려냈다면 좀 더 진지하고 가치 있는 자료를 구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할머니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와 말투를 그대로 실은 자료는 방언이나 세대별 언어를 연구하는 데도 좋은 자료로 활용되리라 기대된다. 열 분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시집살이는 문화와 시대적 간절기를 살아온 여성상이며 근현대사를 며느리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가슴 절절하게 버무려내는 시집살이의 매운 맛이며, 어렴풋하게 떠올리는 새댁시절의 달콤함이다.
덧붙이는 글 |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 10>┃지은이 신동흔 외┃펴낸곳 도서출판 박이정┃2013.2.18┃값 3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