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책을 자유와 평등이 넘실대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내는데 아낌없이 생명을 던진 사람들 그 순결하고 강인한 영혼들에 바친다. 그 영혼들은 저마다 '아집'으로 가득 차 지리멸렬한 오늘의 '진보 정치세력'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이 땅의 진보가 '정치 신화'에 젖은 게으름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도 고통 받고 있는 민중과 민족 앞에 실사구시로 거듭나기를... - 들어가는 말 중

박헌영 트라우마 손석춘이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과 나눈 이야기
박헌영 트라우마손석춘이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과 나눈 이야기 ⓒ 철수와 영희
분단 이후 태어나 반공을 국시로 알고 자란 세대인 내게 간첩은 무조건 '나쁜 짓을 한 사람'으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 머릿속에 간첩행위는 국가의 존립을 뒤흔드는 일이니 용서하면 안 된다고 세뇌돼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념을 무기로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희생시키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북에서 김일성에 의해 미제국주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된 박헌영에 대해 그의 아들 원경 스님과 손석춘이 나눈 이야기를 엮은 책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가 나왔다.

일제를 벗어난 후 곧 분단 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한국 근현대사는 피로 얼룩져 있는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 모든 과정을 몸으로 겪어 낸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는 없을 수 없고, 그 트라우마의 정점에 박헌영이 자리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박헌영은 일제시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실천가였지만, 한국전쟁 후 간첩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됐다. 박헌영의 트라우마를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박헌영과 유사한 형태의 마녀사냥이 남북한의 정치권력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선 유신 시대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만이 아니라 가깝게는 왕재산 사건이나 전교조를 빨갱이 집단으로 몰아가는 일, 쌍용차 옥쇄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일 등 극복되지 못한 트라우마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박헌영이 추구했던 세상은...

박헌영은 남에서는 공산주의자였기에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철저히 거부되어왔고, 북에서는 '미 제국주의 간첩 및 국가전복 음모'라는 죄명으로 숙청됨으로써 북의 역사에서도 추방되어 버렸다. 남과 북 어디서도 그 존재를 입에 올리거나 평가받을 수 없는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박헌영 트라우마는 분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박헌영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며 한국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박헌영과의 정직한 소통은 시발점이 돼야 한다.

박헌영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지닌 자본가적 부패와 제국주의 경향을 간파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진보적인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조국을 만들고 싶어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박헌영이 추구했던 세상은 조선인의 힘으로 이루는 완전독립과 통일 조국을 향한 진보적 사회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그렇다 멀리는 상해에서, 가깝게는 남조선에서 혁명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 남조선에서 미군정 인사들에게 이승만 세력을 감싸고돌지 말고 민전(1946년 남한 내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 좌익단체들이 결성한 단체로 '민주주의민족전선'임) 인사들의 활동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속히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가고 조선의 통일은 조선인 손으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 <박헌영 트라우마> 중

박헌영이 정말  미군정의 간첩이었을까? 숙청당한 박헌영이 미군정에 협조했다거나 정보를 제공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이 외무성을 통해 박헌영을 처형하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라고 하자 북한은 서둘러 박헌영을 처형한다. 미군정 정보 수집에 따르면  당시 박헌영이 정권을 잡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남한만이 아니라  북의 김일성도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이론과 실천력을 겸비한 실력자 박헌영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박헌영은 분단 시대가 낳은 희생물이 되었다.

사회적 진보적 가치가 담긴 8월 테제

책 말미에 실린 박헌영이 해방 직후 쓴 8월 테제(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의 내용이 지금  진보를 부르짖는 이들의 생각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사실은 놀랍고도 충격적이다. 토지 무상 분배만이 아니라 무상 의무 교육,  8시간 노동제, 공장주 마음대로 해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 남녀 동일임금제, 완전 독립, 모든 합법적 이념 단체가 억압받지 않을 권리 등등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정치, 사회적 진보적 가치가 기록되어 있다.

공장주에게 내쫓긴 실업자들은 일자리에 복귀하기 위해 모두 투쟁해야 한다. 실업자 운동은 전반적인 노동운동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현실적인 방안인가. 여기저기  해고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펼치고 있다. 재능 농성장과 대한문 분향소는 강제 철거되었다. 이제 해고노동자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 힘을 모아 싸워야 할 때다. 싸움의 구심점을 만들려는 진보적 사고를 지닌 실천가라면 부록으로 수록된 8월 테제만이라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옳은 정치노선을 내세우고 이것을 실천하려면 모든 옳지 못한 경향과 적극적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 과거의 파벌들은 다시금 파벌주의를 부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사회개량주의자가 아니면 우경적 기회주의자이나 이러한 단체와 그 경향을 반대할 것이다 사회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군중을 우리 편으로 전취할 것이며 우경적 기회주의자에게는 자기비판을 전개시킬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극좌분자들과 투쟁하여야 하는바 그들은 인민과 분리될 위험성을 조성하고 있다 그들은 일체의 준비 없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옳지 못하다 폭동을 일으키기 위하여서는 인민을 조직하며 옳은 전략을 세우고 그에 대해 인민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경적, 극좌적 경향을 청산하고 모든 힘을 기본 노선 실현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의 투쟁 원칙은 이와 같은 것이다. - 8월 테제 중

덧붙이는 글 | 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글/ 철수와 영희/ 13,000



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2013)


#박헌영 트라우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