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기사를 보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익명을 전제로'라는 말이다. 이는 때에 따라서는 '고위 관계자'라는 말로도 포장되기도 한다.
정부 등의 공식 발표는 아니지만, 깊숙이 관계가 있는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빌려 보도하는 것으로 언론은 그 정보 제공자의 신분을 보호하고자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 위기 사태와 관련하여 홍수처럼 쏟아지는 '익명' 혹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는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국민을 더욱 혼란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CNN 방송은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군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며 한반도 위기 관련 사태를 집중하여 보도하고 있다. 한국의 종편 채널들도 다르지 않다. 거의 '단독', '특종'의 꼬리표를 달아가며 "곧 핵 항공모함이 한반도 근처로 들어온다" 등의 익명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 4차 핵실험 징후 있다" 익명 보도... 통일부 장관 확인으로 파장 확대8일(이하 한국시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일보>는 이날 자 조간신문에 "(단독) 북한 4차 핵실험 징후 포착"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북한에서 4차 핵실험이 곧 단행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정부 고위 관계자는 풍계리 남쪽(3호) 갱도에서 최근 인력과 차량의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며 "3차 핵실험(2월 12일)을 앞두고 보였던 행동과 유사한 상황이어서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라는 첩보도 입수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실제로 추가 핵실험을 위한 마무리 작업하는 것인지, 우리 정부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시위성 기만전술인지 분석 중"이라며 "핵 실험장 주변의 부산한 움직임은 지난주 중반부터 포착됐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의 이런 단독 보도는 <로이터통신>이나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그대로 보도되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익명의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 그렇게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8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함경북도 풍계리 남쪽 갱도에서 인원과 차량이 왔다갔다하고 있어 4차 핵실험 징후 아니냐는 말이 있다"는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의 질문에 "그런 징후가 있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고, 이 문제는 정보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류 장관의 이러한 답변은 즉각 한국의 장관이 북한의 4차 핵실험 징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에 속보로 보도되었다. 이어 미 CNN을 비롯한 AP, AFP, 로이터통신은 물론 영국의 BBC, 가디언 등 전 세계 언론에 중요 뉴스로 속보로 전해졌다.
미국의 ICBM 발사 연기 보도 등 다소 한반도 긴장 격화의 상황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류가 관측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한국 장관의 '북한 4차 핵실험 징후' 관련 발언은 그만큼 파장을 확대해 갔다.
국방부, 부랴부랴 '핵 실험 징후 아니다" 해명 기자회견 열어...이렇게 파장이 확대하자 한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 (풍계리에서의) 활동은 핵실험 징후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남쪽 갱도에서 차량과 물자, 인원이 왔다갔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활동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번 3차 핵실험 때 설명했던 것처럼 당시 서쪽, 남쪽 갱도에서 동시에 핵실험 준비를 마쳤다"면서 "지금도 마찬가지로 북한은 마음만 먹고 결심만 하면 언제든지 핵실험을 할 수 있다"며 "북한은 상시로 핵실험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종합해 보면, 북한은 이미 지난번에 두 군데 갱도에 관한 핵실험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언제든지 핵실험 추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며 차량 증가는 일상적인 상황이라 이를 핵실험 임박한 징후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분석은 '38북한(North)'를 비롯한 북한을 전문적으로 분석 보도하는 매체나 전문가들이 이미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풍계리 핵 실험장과 관련한 특별한 징후가 있다는 보도나 전문가들의 주장이 없었다.
하지만 <중앙일보>는 정부 고위 관계자와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북한의 4차 핵실험 징조가 있다고 특종 보도했고, 한국의 주무 부처 장관이 이 보도에 관한 입장을 말하는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답하면서 순간 '북한 4차 핵실험 추가 실시 가능성'은 전 세계 외신을 타면서 확대해 갔다.
"그런 징후에 동의 발언 아니다" 뒤늦게 발언 수정, 모양새만 어정쩡...뒤늦게 국방부가 공식 부인하는 등 파장이 더욱 확대하자,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8일 오후에 속개된 국회 외교통일위 전체회의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 징후와 관련한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류 장관은 국방부의 발표 직후 의원들의 후속 질문이 이어지자 "그런 징후에 동의해 말한 적은 없다"며 자신의 오전 발언을 수정했다. 류 장관은 "윤상현 의원이 '그러한 징후가 있다'고 말한 직후 한 질문에 내 의도와 관계없이 (보도가) 나간 것 아닌가 싶다"고 언론에 책임을 돌리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발언을 수정하는 어정쩡한 자세를 보였다.
자세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익명'이나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특종을 갈구하는 일부 언론의 태도도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확고한 대북 정책 기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부 부처의 책임급 장관이 파장이 클 수가 있는 사항에 대해 어정쩡한 답변을 한 다음 문제가 확대되자 슬그머니 얼버무리는 태도는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는 한반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외교, 안보부처 수장의 이러한 신중하지 못한 발언과 어정쩡하게 정정하는 태도를 보면서 국민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