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널빤지로 만든 집은 낮고 어두웠습니다.
문 옆에는 요금과 영업시간, 사쿠(Condom)의 사용과 성병검사 등을 명시한 '위안소 규정'을 적은 판자가 붙어있었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서서 미동을 않고 한참을 서있었습니다. 천천히 동공이 어둠에 적응되자 방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무침대와 그 침대의 발치에 놓인 대야 하나. 그 방안에 있는 집기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침대에는 얇은 매트리스에 군용담요가 요로 한 장 깔리고 또 다른 담요가 이불인 듯 덮여있었습니다.
질 세정용 놋대야는 조각난 가슴처럼 모서리가 깨져있었고 바닥에는 오랫동안 고였던 눈물인양 녹색의 녹이 피었습니다.
그 눈물의 주인은 바로 이방에 강제 수용된 소녀입니다. 그들은 그녀를 '여자정신대'로 불렀고 우리는 지금 '위안부'라고 호칭합니다. 하지만 유엔인권위원회(UNCHR ;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Human Rights)에서는 '일본군 성노예(Sexual slavery victims for the Japanese imperial army)'라고 표현합니다.
침대 머리맡에는 간신히 얼굴 하나 내밀 만한 창문이 뚫려있고 그 창 위로는 흰색 천이 내려져있습니다. 흰 천은 그 소녀의 광목치마처럼 주름져 있었습니다.
저는 5와트의 필라멘트 전구가 핏빛을 내고 있는 그 방을 서둘러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방의 광목치마 소녀는 이국만리 낯선 곳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군인들이 무시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들을 견뎌야했습니다. 그들에게 저항할 어떤 의욕도 말라버린 상태로, 고향으로 되돌아갈 날도 기약하지 못한 채 나무침대에 통나무처럼 누워 저 낮은 천장의 붉은 빛을 올려다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저는 그 침대 옆 위안소 바닥에 그녀처럼 누웠습니다. 그리고 필라멘트의 붉은 선으로 부터 멀어지면서 점점 어둠으로 변하는 천장의 계조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그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칼날이 되어 제 발가벗긴 몸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칼날을 피하기 위해 몸을 떨어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제 몸은 이미 그 칼날을 피할 수 없는 도축장의 육용가축이라는 것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가 떨어지는 칼날로 제게 내려오고 있는 그 필라멘트로부터 가까스로 눈을 피했습니다. 필라멘트에서 나온 빛의 계조가 어둠으로 바뀐 부분에 시선이 닿자 그 두려움은 다시 외로움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누워있는 이곳은 이미 한 달이나 넘게 배에 실려 온 곳이 아닌가. 동서남북을 어림 조차할 수 없고, 일가와 친척은 물론, 제 옆에서 내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려움을 간신히 수습하자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그 통증은 날카로운 칼끝이 찌르듯 아리게 시작해 그 칼날이 속을 헤집는 쓰린 아픔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의 절정에서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음대신 한 마디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 엄마~"
아픔이 스치고 다시 설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나는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그 설움의 근원을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이처럼 처참하게 도륙당해야 하는가. 매일 도축장의 가축과 다름없이 되풀이되는 죽임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죄는 무엇이란 말인가!"
- 2013년 4월 9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재현된 실물 '위안소'에서"우리가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릴 기여!" 오는 8월에 개최될 민족미술인협회서울지회(서울민미협)의 제4회 리얼리즘전의 전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전으로 치르기로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의 소녀들(가칭)'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눔의집, 민족문제연구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한국정신대연구소 등과 함께 연대하게 됩니다.
이 전시와 관련해 참여 작가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의 이해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현재의 실태를 파악하기위해 지난 9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을 방문해서 생존해 계신 피해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관람했습니다.
역사상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이곤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가해국가의 발뺌과 피해국가의 당장의 국익과 정권의 이해관계에 의해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 남아있습니다.
기막힌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은 국가가 나서지 않는 그 잔혹한 폭력을 알리기 위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으로 갑니다.
90세 전후의 할머니들은 노환과 각종 질환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몸을 이끌고 스스로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여전히 기구한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새벽녘 화롯불처럼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매년 세상을 등지고 있고 생존자들조차 퇴행성관절염과 파열된 연골판이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하다고 역사의 사실과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또다시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이 어이없고 기막힌 현실을 앞에 두고 침묵하면서 탐미의 욕망에만 사로잡힌 예술가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시대 리얼리즘전은 예술가의 소명으로 동시대를 증언하고자하는 미술적 발언입니다.
이 미술전은 외교적 갈등을 빌미로 침묵하는 정권을 대신하여 전쟁범죄의 참상을 알려 평화의 가치를 숙고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끝까지 인륜을 저버린 제국주의의 망령들을 예술 화법으로 단죄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나눔의 집'은 생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생활터전을 제공하기위해 1992년 10월 서울의 서교동에서 개소한 이래 명륜동과 혜화동을 거쳐 1995년 독지가의 기증으로 마련된 현재의 땅에 생활관을 지어 이전하였습니다.
현재는 1800평의 부지에 생활관, 역사관, 교육과 수련관, 사무동, 집중치료동이 자리 잡고 있으면 현재 총 9명의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께서 설명과 안내를 맡아주었습니다.
"이곳에는 1년에 1만여 명의 방문객이 찾아오고 그중 3천여 명이 일본 사람입니다. 가장 연세가 적은 분이 86세. 그러므로 야간에도 응급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침 8시에 아침을, 12시에 점심, 오후 5시에 저녁을 하시고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간식을 준비해드립니다. 아침마다 간호사께서 출근하셔서 혈압과 당수치를 체크하고 일주일에 2번씩 병원에 다니십니다. 외부에서 오시면 증언 듣기를 바라요. 그때는 자발적으로 3분 정도가 교대로 증언을 하십니다. 수요시위를 참여해오셨는데 3년 전부터는 의사선생님께서 겨울에는 못나가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날이 풀리면 올해도 나가실 예정입니다. 요즘은 미국의 한인단체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미국하원의 마이클 혼다(Michael Honda)의원과 팔레오마베가 연방하원의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혼다 의원은 세 번째, 에니 팔레오마베가(Eni Faleomavaega) 의원은 네 번째 방문으로 2007년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채택을 주도한 의원입니다. 수산네 에버스테인(Susanne Eberstein) 스웨덴 국회 제1부의장도 방문하셨습니다. 이 분은 미국유학 때 영상을 보고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머님들께서는 살아있을 때 꼭 공식사죄를 받고 싶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세요. 그래서 작년에는 할머님들이 그리신 그림을 엽서로 만들어 일본의 중의원과 참의원 721명에게 초대엽서를 보냈어요. 일제 강점기의 피해자가 이곳에 있으니 와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 결과 카사이 아키라(笠井亮) 공산당 소속 중의원이 왔다갔습니다. 올해는 방문자들께서 관람한 뒤 엽서를 써서 지인들께 보내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분이 많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들이 워낙 연로하다보니까 살아있을 때 공식 사죄를 받고 싶다는 할머니들의 바람을 이루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근혜정부가 할머니들께는 마지막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책임감을 갖고 문제해결을 해달라고 요청 드리고 있는데 결과는 모르겠습니다." 안 소장님의 조급한 마음을 듣고 보면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그것이 언제 해결되느냐는 것도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생활관의 거실에서 피해할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일곱 분이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두 분은 앓아누우셔서 방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들은 무표정했고 앉아 계신 것조차 힘들어 김군자, 이옥선 할머니께서는 보조기구에 의존하고 계셨습니다. 감정이 증발된 할머니들의 그 무표정에서 오히려 수없이 많이 중첩된 표정이 읽혀졌습니다. 치욕과 증오, 기다림과 좌절, 기대와 희망….
작년에 입소하신 유희남 할머니께서는 일행을 대면하자 얼굴에 노기를 담아 일갈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좌절과 무기력에 휩싸였던 공간이 순간 깨어났습니다. 저는 할머님의 꾸짖음을 통해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리고 숨죽이며 기다린 그 시간의 질량이 얼마나 큰 무게로 스스로를 짓눌렀는지를 명백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노하는 할머니에게 오히려 안도했습니다. 분노는 아직 의욕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요. 맞아요. 할머님들이 맞아요. 우리가 잘못했어요. 우리는 사실로 부터 그리고 진실로 부터 고개를 돌리는 그들을 여전히 바로잡지 못하고 있어요."김건희 화가와 일행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렇듯 숭엄한 사실의 인정을 통해 분노는 금방 풀렸습니다.
이말다 화가가 준비해온 스카프를 목에 감아드렸습니다. 할머니들은 색깔과 무늬의 선택에서 자신들의 기호를 분명히 했습니다. 선택을 끝낸 할머니들을 차례로 포옹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을 감은 팔은 쉽게 풀리질 않았습니다.
떡 바구니도 풀었습니다. 얘기 보따리도 풀렸습니다. 스스로 퉁퉁 부은 발를 보여주고 생활관에서 일어나는 할머님들의 에피소드들도 들려주셨습니다. 눈물은 다시 몇 번의 폭소로 바뀌었습니다.
수요시위에 참가하는 양희성군과 심세연양 등 몇 명의 청소년들도 함께했습니다. 화폐수집이 취미인 양희성군은 그동안 간직했던 군표(점령지에서 일본군이 발행했던 통화대용의 특수화폐)를 역사관에 기증했습니다.
유희남 할머님께서는 제게 혼혈이 아닌지를 물으면서 당신의 옆에 안기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86세예요." 저는 할머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16세 소녀가 살고 있으신 것 같다고 위로했습니다. '16세'라는 얘기에 손사래를 쳤지만 얼굴은 보름달처럼 밝아지셨습니다.
아리랑의 화가 두시영 선생님이 아리랑을 선창하고 모두가 합창했습니다. 모두가 한명 한명씩 손을 맞잡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발길을 돌린 작가들을 할머님이 따라 나왔습니다. 현관에서도 잡은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집밖으로 나오자 잠시 날리던 눈발이 빗방울이 되어 '못다 핀 꽃' 동상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볕 좋은 초여름 날씨였고 퇴촌에 당도했을 때는 흐렸습니다. 하루 만에 사계절을 겪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나눔의 집을 거쳐 이제 역사가 된 할머니들'이라는 액자가 역사관 외부 벽에 걸려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세상을 등진 8분 할머님의 간략하게 요약된 몇 줄의 생애만으로도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故 지돌이 : 1923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17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8살에 조선인 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서 생활했으나, 남편이 징병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22살 때 중국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따라갔다가 '석문자(石門子)위안소'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귀가 어둡고 한국말이 서툴러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할머니는 "살아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던 남편을 늘 기다리다가, 2008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지돌이 할머님의 85년 생애 중에서 67년은 '살아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는 징용 간 남편을 기다린 세월이었었습니다. 이승에서 부인을 지켜주지도 못했고 살아 돌아오겠다는 언약도 어긴 그 미운 남편은 저승에 먼저 가셔서 지돌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계셨는지…….
서울로 되돌아오는 내내 유희남 할머니의 한마디가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일본놈들은 우리가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릴 기여. 한국에서도 같은 마음인 사람들이 있을거구먼." 과연 그들의 뜻대로 피해자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다고 진실이 가려질것인가?
서울로 되돌아온 일행은 인사동에서 만남의 집 방문을 정리했습니다. 이구영 작가(서울민미협회장)가 며칠 전에 본 연극 '빨간시' 얘기를 했습니다.
"성상납으로 자살한 여배우 사건이 일본군위안부의 삶과 중첩됩니다. 결국 전범국에 의해 자행된 이 폭력이 오늘날도 종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권력화된 자본이 오늘날도 여전히 여성의 인권을 짓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4월 10일) 11시 30분 이 작가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바람 부는 수요일, 일본 대사관에 갑니다……." 1992년 1월 8일에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낮 12시 정각에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22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허리가 굽고 얼굴에는 골이 깊게 파인 할머니전사들의 수요시위는 4월 10일, 제1069차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시위를 통해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것을 일곱 가지입니다.
하나, 전쟁범죄 인정
둘, 진상규명
셋, 공식사죄
넷, 법적배상
다섯, 전범자 처벌
여섯, 역사교과서에 기록
일곱,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