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경찰생활은 어땠나. 안정적인 공무원이 됐는데도 문학의 꿈은 포기가 안 됐는지."대용교도소 교도관, 정보경찰, 해안 경비, 파출소 순경 등 다양한 부서 체험을 했다. 1960년대엔 강원 강릉 등에 있었다. 이후 서울 중부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거기선 업무가 너무 바빠 도저히 문학공부를 할 수 없었다. 소설이 너무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시위 등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상황에서 '경찰의 소설 창작'이란 그저 꿈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산과 강원도 동해안 근무를 지원했다. 일종의 자의적 좌천이다. 내가 강원도에 있을 땐 바닷가에 북한 공작원 침투 방지를 위한 철조망도 없었다. 동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남파 간첩을 막는 게 임무였다. 하지만 간첩이 매일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근무는 비교적 한적했다.
하루 종일 책 읽고 공부만 하던 시절이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거기서 어민들의 사정을 봐주다가 구속영장이 떨어진 일이 있다. 금어기 때 출어 허가증을 끊어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 어역에서 작업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구속시키는 게 원칙이었는데 그들의 사정을 고려해 구속시키지 않았다.
그 시절엔 북한 해역에선 명태가 엄청나게 잡혔다. 봄이 되면 어족 보호차원에서 어업금지령을 내렸는데, 어민들이 굶어 죽는다고 난리였다. 그 지역 검문소장이던 내가 어민들의 사정을 봐줬다가 구속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구속되진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나타났다. 그때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구속이 아닌 1개월 감봉으로 처벌이 바뀐 것이다. 현대사의 한 단면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이때 경험은 내 소설의 주요한 소재가 됐다. 그 이후엔 강원도 양구로 갔다.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양구까지. 참으로 먼 길을 걸었다. 아내는 양구 근무시절에 얻었다.
그러다가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왔고, 정보형사 생활을 했다. 남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네 인생이란 게 결국은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토끼몰이 된 것 같다'고. 서울대학교 담당 정보형사로 꽤 오래 일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시절이다.
당시는 경찰서 정보과의 위세가 대단한 때였다. 그 시절 이야기 역시 소설로 썼다. 야당 당사 출입도 자주 했는데, 내 기질 때문인지 야당 정치인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때가 유신이 선포되기 얼마 전이다.
첫 작품집 <늰 내 각시더>를 실천문학사에서 냈다. 1992년 즈음이다. 당시는 거기서 책이 나오면 경찰이 내사에 들어가던 시절이다. 출간되고 얼마간 정말 시끄러웠다. 첫 책엔 단편 <그리고 말씀하시길> 등이 실렸다. 고맙게도 신문마다 작품집 출간소식을 크게 다뤄줬다. 신경숙, 윤대녕 등과 함께 주목받는 신인으로 신문에 오르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즈음 제대로 된 문학공부를 못 한 것이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 오십 넘긴 나이에 대학엘 갔고, 대학원을 다녔다."
- 본격적인 등단과 작품 활동 이전엔 어떤 일을 했나. 그러니까 경찰을 그만두고 난 이후 말이다."소설을 쓰려고 경찰을 그만둔 게 1970년대 초반이다. 고생을 많이 했다. 퇴직 후 부산에 가서 군대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준 것이 인연이 돼 오랜 기간 교류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쥐뿔만큼 받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걸려 다 날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생면부지의 대구로 갔다. 조그만 자동차수리점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화재로 가게를 태워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포장마차도 하고, 식당도 하고….
아내가 고생을 심하게 했다. 시골에선 먹고살 만한 집 딸이었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그럼에도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처갓집 신세는 지기 싫었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 테이블 3개의 콧구멍만 한 식당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대박이 터져 장안에서 제법 유명했던 춘천옥이 됐다. 장사가 잘 될 때나, 손님이 없어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때나 문학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 돼도 일기는 빼놓지 않고 썼다. 나중에 보니 그게 내 문장력의 초석이었다.
등단 직후에는 소설가 김원일, 김주영과 친했다. 이들과 어울려 인도 등도 여행했다. 술자리에선 가끔 내 첫 작품집이 안줏거리가 됐다. 갓 등단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이야기다. '정말 인상 깊게 읽었소.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작품을 쓰시오'라는 선배 작가들의 격려와 편지를 여러 차례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에게서 받은 편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에밀리 브론테에 관한 내 글을 읽고 보내준 편지였다. '사장된 우리의 토속 언어를 절차탁마했다'는 평가가 참 기분 좋게 들렸던 시절이다."
"내게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엔 글을 쓰고 싶다"
- 문학과 소설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대학 진학에의 열망도 컸던 것 같다. "용산고등학교 동창 중에 서울대학교 농대 학장을 지낸 이가 있다. 그 친구가 개방대학교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오십이 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전문대학교 입학식에 설레는 마음으로 서 있던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오십대 사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문대를 졸업하고는 4년제 대학에 편입했고, 다시 대학원을 다녔다.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내 문체를 변화시켰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는 모던하고 세련되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게 내 문학을 후퇴시킨 한 요인이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쓴 8편의 소설이 있었다. 그걸로 책을 내자는 제안이 왔다. 이름 있는 출판사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의외의 답변이 왔다. '왜 문체가 이렇게 바뀐 것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그걸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문체와 어휘의 소중함을 스스로는 몰랐던 것이다. 평론가들이 주목했던 내 스타일이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사라져버렸다. 얻은 건 학벌이고, 잃은 건 문체였던 것이다.
최근엔 작가들의 문학세계를 탐구하는 글을 문예지에 연재하고 있다. 예전에 '세계문학기행'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방식과 논리에 따르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런 원고를 쓸 때는 그들의 삶과 작품을 완전히 내 것으로 육화시키는 게 첫째 목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고통 속에 머무는 게 즐겁다. 천성이 그런 모양이다."
- 끝으로 현재 운영 중인 잔아문학박물관의 향후 계획과 당신의 문학적 미래를 이야기해주면 좋겠다."'바로 오늘이 내 인생의 전성기'라는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는 건 젊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죽음의식'이다. 이게 나에게는 불치의 병이다. 존재하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병.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고통을 사랑했다.
문학은 구체화되지 않는 고통이라는 허무의 치유 수단이었다. 그러기에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고 그걸 즐겼다. 운영했던 식당 춘천옥도 그렇다. 돈 욕심을 냈다면 꽤 큰 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는 적절하게만 해결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잘나가는 식당 사장 생활을 좀 더 일찍 접고 문학에 전력투구하지 못한 게 후회될 뿐이다.
돈을 많이 벌 때도 행복을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행복보단 불행이란 단어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게 내 문학의 힘이라고 믿는다. 지금껏 진정으로 나를 울게 했던 것은 없었다. 지독한 가난과 불행도 나를 제대로 울리지 못했다. 내게 문학은 훈련되거나 학습된 게 아니라 생래적인 것이다. 문학은 내게 신성한 종교고 진실한 눈물이다. 문학이 나의 예수고 부처고 그 이상의 것이다. 문학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흔들어대는 우리 시대가 서글프다.
잔아문학박물관엔 곧 세미나 공간이 만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의 향기를 나눠주는 소박한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보잘 것 없겠지만 한국의 문학 토양의 돋우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운영에 몇몇 어려움은 있으나, 이전에 내가 거쳐 온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해결해나갈 자신이 있다.
생이 끝나기 전, 내게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엔 글을 쓰고 싶다. 외부 행사나 나가는 것도 좀 줄이고, 창작에 전념할 계획이다. 남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부지런히 써야 하지 않겠나. 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자산은 건강이다. 그런 차원에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일흔을 이미 넘겼다. 큰 욕심이 있겠나.
그저 마음 안에 자리한 나의 문학적 미래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신문 연재소설과 문예지 작가론 연재도 지속할 것이고, 전작 장편도 준비 중이다. '김용만의 대표작'으로 불릴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어쨌건 살아 있는 한은 쓰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삶과 한국 현대사의 접합점을 찾아가는 작업을 지속한다면 제대로 된 소설 하나쯤은 나올 것이라 스스로에게 격려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