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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변호사들> 표지
<노동자의 변호사들> 표지 ⓒ 미지북스
'변호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말쑥한 정장을 입고 법정에서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는 모습? 검은 가방을 들고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 우리는 특히 후자의 변호사들을 텔레비전에서 가끔 본다. 재벌 회장이 탈세나 횡령으로 소환됐다는 뉴스 리포트 속 변호사들은 종종 재벌 회장의 대리인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김앤장' '율촌' 같은 대형 로펌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수백억 원을 탈세하고 그 돈으로 비자금을 만든 재벌 회장도 물론 변호 받을 권리는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하지만 재벌에게 막대한 수임료를 받은 변호사들이 무죄 선고나 솜방망이 판결을 끌어내는 동안, 노동자들은 법의 보호 밖에서 혹은 법의 이름으로 카운터 펀치를 연타로 맞는다. 부당해고, 노조 파괴, 공권력 투입, 어마어마한 손해배상 청구….

대한민국 헌법 32조는 말한다. 노동자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근로조건을 제공해야 한다고. 헌법 33조는 말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인간적 근로조건과 노동3권은 대한민국이 노동자들과 맺은 최소한의 약속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그 약속은, 원래 무슨 글자가 쓰여 있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 낡은 광고판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권리가 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도 모르는 노동자들, 설령 권리를 알아도 비싼 변호사를 찾아갈 엄두를 못 내는 노동자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노동자를 위해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들

민주노총 법률원 단체사진 창립 11년째를 맞는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 변호사·노무사·간사들. 왼쪽에서 5번째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권두섭 변호사. 사진은 지난 2월 21일 촬영분.
민주노총 법률원 단체사진창립 11년째를 맞는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 변호사·노무사·간사들. 왼쪽에서 5번째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권두섭 변호사. 사진은 지난 2월 21일 촬영분. ⓒ 민주노총법률원

그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들이 있다.

내가 공저자로 참여한 책 <노동자의 변호사들>은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의 변호사들(또 노무사들)의 이야기다. 창립한 지 11년째인 민주노총 법률원에는 약 30여명의 변호사·노무사·간사들이 오늘도 기울어진 정의를 바로 세우려고 뛴다. 대형 로펌을 포기하고 이곳에 온 변호사들의 일상과 고민, 그들이 씨름해온 노동 사건들,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싸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나와 만화가 최규석이 취재와 인터뷰로 엮어냈다. 내가 법률원이 걸어온 길과 법정 싸움을 주로 다뤘다면, 최규석 만화가는 변호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앞서 잠깐 언급한 고급 승용차나 세련된 사무실 따위는 노동변호사들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파업과 농성 현장을 뛰어다니며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증거를 찾는다. 연행된 노동자가 있으면 그들은 새벽에도 경찰서 유치장으로 달려간다. 밤샘은 기본이고, 여성 변호사들도 급하면 고무줄로 머릴 질끈 묶고 법정에 나간다. 로펌 변호사들은 건당 거액의 성공 보수를 받지만 법률원 변호사들을 찾아오는 노동자들은 수임료조차 제대로 못 내기 일쑤다. 그럼에도 그들은 법전과 자료에 파묻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필살의 논리'를 찾는다. 그들이 싸우는 검찰과 사법부는 어떤가. 여전히 노동운동을 무슨 범죄로 보고 구속자가 많을수록 성과를 올렸다고 보는 보수적 의식이 지배적이다.

"검찰은 노조에 유리한 자료는 아예 무시하거나 누락하고, 법원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 보고 판결을 내렸어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끼워 맞췄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호인단에게도 압수수색권을 좀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공사 측 자료를 압수해서 파업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권두섭 변호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 2부 6장. 파업은 어떻게 범죄가 되는가 중

저 철탑이나 종탑에 올라가는 노동자들만큼, 변호사들 역시 불리하기 그지없는 법의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세간을 시끄럽게 한 노동사건도, 재판이 시작되면 이미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때 노동법을 둘러싼 결정적인 판례들이 나온다. 판례는 사건에 해당되는 노동자는 물론 전체 노동자에게 미친다. 판례에 따라 파업이 합법이 되거나 불법이 되며, 해고가 정당화되거나 무효화되고, 근로조건이 악화되기도 또 개선되기도 한다.

물론 고용주에게 유리한 판결은 즉각 집행되는 반면 노동자에게 유리한 판결은 겨울잠 자는 곰처럼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나 어떤 판결이 나느냐에 따라 노동자들의 싸움에 명분이 실리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명분이 있을수록 노동자들은 오래 버틸 수 있고 승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노동변호사들은 밤샘 하고 휴가를 포기하면서 미친 듯 일에 매달린다. 한 예로, 2012년 여름 안산의 자동차부품회사 SJM이 용역깡패를 동원해 직장폐쇄를 자행했는데 이 사건으로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들은 아무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

미끄러지고 있는 노동기본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미끄러지는 노동기본권 현재 금속노조법률원 김태욱 변호사와 여러 노동변호사들이 정리해고 원인의 위법성을 놓고 법정에서 다투고 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미끄러지는 노동기본권현재 금속노조법률원 김태욱 변호사와 여러 노동변호사들이 정리해고 원인의 위법성을 놓고 법정에서 다투고 있다. ⓒ 오준호

제주도에는 '도깨비 도로'란 곳이 있다. 겉으로 분명히 오르막인데, 기어를 중립에 두고 있으면 자동차가 슬슬슬 위로 올라간다. 중력의 법칙이 무시된다. 정말 무슨 도깨비가 차를 끌어당기는 건가 신기한데, 그럴 리는 없다. 착시현상이다. 지형 때문에 눈에 오르막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리막길인 것이다. 

그런데 이 도깨비도로 같은 곳이 바로 대한민국 법정이다. 법정은 스스로 공평무사한 곳이라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법정은 결코 평평하지 않다. 그곳은 기업주와 주주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판결은 그들의 이익을 향해 구른다. 헌법에는 버젓이 노동3권이 있다는데 어째서 노동기본권은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까. 노동기본권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가가, 아주 교묘하게 노동기본권을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법전문가들은 국가가 초래하는 노동기본권의 위기를 세 측면에서 지적한다.   

첫째는 법 자체로부터 오는 위기다. 국가가 노동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법을 제정·도입하는 경우이다. (중략) 둘째로는 법의 적용으로부터 나오는 위기다. 사법부는 법 조항을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해석하고 정부는 자의적으로 법 집행에 나선다. (중략) 셋째로는 필요한 법을 만들지 않아서 생기는 위기다. 정작 필요한 법을 국회에서 제정하지 않거나 미루는 것이다. - 2부 여는 장. 위기에 처한 노동3권 중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창립멤버이자 현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장)와 나는 그동안 법률원이 다뤄온 수백 가지 노동사건 가운데 어렵게 골라 열 장면을 구성했다(참고로 이 책은 권 변호사의 14년의 경험과 각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다). 각 장면들은 언급한 노동기본권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만 몇 개 들어보자. 권 변호사는 비정규직 보호법은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고 말한다. '보호'하는 법이 악법이라니? 비정규직 보호법은 도리어 불안정 고용, 간접 고용을 정당화하는 근거라는 것이다. 2003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자 원청회사가 하청업체를 폐업시켜 노조 조합원들을 싹 쫓아낸 일이 있었다.

현대중공업은 1980년대에 악명 높았던 '식칼테러'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간접 고용 구조를 이용해 손에 피 안 묻히고 노동3권을 무력화한다. 변호인단은 재판에서 원청이 사용자라는 걸 밝혀냈지만, 해고까지 철회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변화된 판례가 조금씩 쌓여 최근 현대자동차에게 하청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라는 판결이 나오게 됐다.

사실 나부터, 평소 노동문제에 진보적 시각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노동기본권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몰랐다. 나는 노동운동이 탄압받는 것은 이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라서 그런 거라고 단순하게 이해해왔는데(물론 그것은 여전히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은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에 잘 순응하면 불이익이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그러나 진실은 이미 이 사회의 법적 제도적 기초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데 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노동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기본권이 미끄러져가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TV를 보면서 왜 노동자들은 만날 '불법 파업'만 하느냐고 혀를 차곤 한다. 그런데 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부분 불법인지, 자문해본 적 있는가. 외국에 비해 노동자들이 유난히 과격해서인가. 권두섭 변호사의 말이다.

"파업이란 단지 노동자가 사용자를 위해 일을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법원은 그게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사용자를 속이거나 신체를 힘으로 구속한 것이 아닌데도요." - 2부 6장. 파업은 어떻게 범죄가 되는가 중

업무방해죄란, 조직폭력배가 남의 가게 앞을 가로 막고 "자릿세를 안내면 장사 못 할 줄 알아" 할 때 적용하는 바로 그 법이다. 그런데 헌법 33조에 따라 파업권이 있는데도 법원은 노조 파업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한다. 법원은, 파업은 기본적으로 범죄이며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법적 책임을 면제해준다고 한다.

권 변호사는 그 정당한 사유 다투기가 또 하늘의 별 따기라며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된 나라 중에 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들은 파업은 나쁜 거라고 세뇌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가 파업할 권리를 포기하고 노동기본권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권리를 알아야 권리를 지킨다

나는 사건마다 당사자인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사건의 배경과 본인들의 경험담을 듣기 위해서다. 그런데 장기투쟁 중인 노동자들의 경험은 언어만으로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만큼 고통의 흔적이 몸에 배인 터다. 변호사들 역시 이런 정서의 노동자들과 매일 만나고 상담을 하다 보면 감정적 갈등을 겪는다. 권 변호사의 고백이다.

"상담하다 보면, '노조 그만하시라'는 말이 목까지 찰 때가 있어요. 조합원도 얼마 안 남고 사측에 다 포섭당하고, 싸우느라 힘은 힘대로 드는데 복수 노조되면서 교섭권 없는 소수 노조로 전락하고, 우울하죠. '이제 노조 그만하시고, 멀리 보고 가세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지만 상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요." - 2부 4장. 이 사람은 노동자일까 아닐까 중

최규석 만화가가 그린 우지연 변호사는, 판사가 재판을 빨리 종결하려 하자 그만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고 한다. 이대로 끝나면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해고되고 징계당한 노동자들의 얼굴이 스쳐갔을 것 같다. 우 변호사의 얼굴을 본 판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원고 소송 대리인이 울려고 해서 종결 못 하겠네요." 변호사들이 논리와 증거로만 싸우는 건 아니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그렇게 일할 수는 없다. 

끝으로, 책을 쓰며 든 한 가지 걱정을 이야기할까 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노동자로 살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노동기본권이니 노동조합 같은 데서 관심을 끄고 열심히 제 한 몸이나 지키자고 생각하진 않을까? 자, 법정은 기울어져 있다. 상대는 박근혜 정부다. <88만원 세대>를 읽은 청년들이 '88만원 세대가 안 되려면 정신 차리고 스펙 관리하자'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기도 한 것처럼, 이 책도 그런 결과를 낳진 않을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권리에 대해 알아야 권리를 지킬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노동 교육' 한 번 받지 않고도 판사가 되고 교수와 CEO가 되는 나라다. 다들 스티브 잡스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노동3권은 뭔지 모르는 청년들이 넘친다(애플에는 '스티브 되다 - being steaved'라는 말이 있다. 잡스의 말 한 마디로 부서가 바뀌거나 해고됨을 뜻한다). 학교도 언론도 노동기본권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은 부족한 노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기본권을 지키는 일은 사막에서 물을 지키는 일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내맡기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엄마저 잃지 않으려면 노동3권만큼은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힘들지만 꼭 필요하고 인간적이며 가치 있는 일이다. 노동변호사들이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며, 또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노동자의 변호사들> (오준호·민주노총법률원 글·최규석 그림 | 미지북스 | 2013.04. | 1만5000원)
이 기사를 쓴 오준호님은 <노동자의 변호사들> 공저자입니다.



#노동자의변호사들#민주노총법률원#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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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기본소득당 공동대표.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세월호를 기록하다> 등을 썼다. 20대 대선 기본소득당 후보로 출마했다. 국회 비서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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