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습니다. 착한 포터 인드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도 사심(私心) 때문에 일정을 늘린 것은 아닐 것인데 제가 경솔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져 온 여름 침낭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마음의 표현도 물질이 동반할 때 의미가 있겠지요. 저의 조그마한 배려가 착한 인드라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기에 주는 저나 받는 그나 다 즐거운 마음입니다.
핼람푸 히말라야라우레비나라(4600m)를 지난 이후 트레일은 해발이 점점 낮아져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3월에 이곳을 지난다면 화려한 꽃의 축제를 즐길 수 있겠지만 지금은 겨울이기에 화려한 계절을 상상하며 걷습니다. 타레파티(3690m) 이후 좌측으로 보이는 핼람푸 히말라야는 랑탕, 고사인쿤드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네팔에 다시 올 구실을 만든 것 같습니다.
울창한 밀림지대를 1시간 30분 정도 걸어 쿠툼상(2470m)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툴루샤브루 이후 처음 만나는 마을입니다. 히말라야에서 마을은 해발 3000m 아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해발을 측정한 것도 아닌데 삶의 지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겠지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차를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해바라기와 핼람푸 히말라야를 즐기며 휴식을 취합니다.
어젯밤 불현듯 '느긋하게 살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산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는 천천히 걷는 것 입니다. 빠른 걸음은 오히려 고소가 올 수 있어 위험합니다. 세상에서도 더 빨리, 더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성공한 삶은 아니겠지요. 자신의 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술 때문에 실수를 많이 하였고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걱정을 끼쳤습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남보다 한 잔을 더 비워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제 술에 대해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오늘 혼자 걸으면서 불현 듯이 더 이상 술에 얽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세요'쿠툼상(Khutumsang, 2470m)을 출발하여 내려가는데 "막걸리 한잔 하세요"라는 우리말이 들립니다. 돌아보니 40대 후반 네팔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시화공단에서 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귀국하셨답니다. 오랜만에 듣는 우리말이 반가워 아주머니 로지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창(네팔 전통주)과 야크커리(안주)를 내왔습니다. 점심과 반주로 술을 몇 잔 들고 나니 얼굴이 불콰해집니다. 사람이 그리운지 아주머니께서 자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오늘 일정이 있기에 일어섰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하니 "그냥 가세요"라고 합니다. 다섯 번 네팔 여행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만난 대부분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상대하는 장사꾼이기에 대가를 지불해야 잠을 자고 밥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가세요"란 말 한 마디에 코끝이 찡합니다. 그 집 아이에게 밥값만큼 용돈을 쥐어 주고 출발하였습니다.
1km쯤 내려오다 생각하니 뭔가 허전하고 아쉽습니다. 눈치 빠른 포터 인드라가 오늘 그곳에서 자도 내일 일정에 무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그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예기치 않은 인연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인연을 맺는 것이 여행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인연을 히말라야에서 만났습니다. 아주머니는 12살 지미와 20살 락바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카트만두에서 공부 중인데 축제 기간이라 집에 와 있다고 합니다.
똑똑하게 생긴 동생 '지미'와 어설프게 생긴 형 '락바'입니다. 형 같은 아우와 아우 같은 형 모습입니다. '락바'는 썰렁한 각종 이벤트로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차분한 '지니'는 유창한 영어로 형을 보조하였습니다. 생긴 모습이나 하는 행동이 서로 바뀌었지만 그들과 트레킹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집 앞에는 넓은 잔디밭과 옹달샘이 있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갈증을 해결합니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술래잡기와 텀블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부분 아이들은 책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한참을 시끌벅적거리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합니다.
가슴 속 이야기저녁 시간, 화덕 주위에 둘러앉아 술과 백숙을 함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주머니 가족과 저와 포터 인드라는 오랜만에 만난 친지 모습입니다. 아주머니는 연신 닭을 뜯어 제 쟁반에 담아 주십니다. 아이들도 무엇이 즐거운지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는 언어가 아닌 느낌만으로 소통이 가능합니다.
아주머니도 사람이 그리운지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저씨,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벌기 위해 간 큰 아들, 영국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는 여동생 그리고 자녀 교육까지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네팔이든 우리나라든 모든 부모의 관심은 자식인 것 같습니다. 자식 교육과 결혼을 위해 자신은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3년간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카트만두에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다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행상을 하시면서 가족을 양육하신 어머님의 모습이 겹쳐 나타납니다.
아주머니의 "그냥 가세요"라는 한 마디 말이 저를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아주머니 가족의 따뜻한 배려와 호의는 히말라야만큼 크고 넉넉했습니다. 10여일의 히말라야 트레킹 보다 '락바'네 가족과의 만남이 더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자연보다 소박한 사람과의 만남이 여행의 의미 배가 시킬 것 같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여행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