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였다. 하루 전날부터 밤샘농성을 해온 사람들은 더했다. '진주의료원 폐업 조례안'을 다룰 경남도의회는 18일 본회의조차 열지 못했다. 진주의료원 운명은 다음 임시회 때 결판이 나겠지만, '폐업 철회 투쟁'은 계속된다.
지난 2월 26일 '진주의료원 폐업 방침'을 발표했던 경남도는 진주의료원 해산을 내용으로 하는 '경남도 의료원 설립 및 운영 조례 개정안'을 경남도의회에 제출했다. 소관 상임위인 경남도의회 문화복지위는 지난 12일 폭력·날치기 처리했다.
이런 속에 본회의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였다. 경남도의회 야권 소속 민주개혁연대는 지난 10일부터 본회의장 점거농성에 이어 15일부터 출입문 봉쇄 투쟁을 벌였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진주의료원지부 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어 17일부터 경남도의회 주변에서 밤샘농성이 벌어졌다. 이들은 경남도의회 본회의가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새누리당 의원들의 등원을 막았던 것이다.
경찰은 17일부터 버스로 차벽을 설치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18일에는 경찰병력이 더 늘어났다. 당초 예정되었던 본회의(오후 2시)가 가까워 오면서 의원들이 도의회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야당 당원들은 의원들의 등원을 막고 나섰다. 차벽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의원들이 도의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누리당 소속 도의원들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는데, 경찰은 최루액을 뿌리기도 했다.
일부 새누리당 도의원들은 경찰복장으로 바꿔 입고 와 등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새누리당 도의원들은 사복경찰 무리 속에 끼어 등원하려고 했다. 도의회 문화복지위 임경숙 의원이 나타나자 시민들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시민들이 임 의원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놀란 임 의원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찰 방송차량을 타고 피했다. 시민들이 달려가 차량 주변에 드러눕기도 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김오영 의장도 잠시 충돌이 빚어지는 속에 등원할 수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야당 당원, 시민들은 경남도의회 건물을 에워쌌다. 건물 뒤편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자리 자리를 지키며 의원들의 출입을 차단했다. 특히 경찰 차벽 안쪽과 도의회 중앙현관 사이에는 진주의료원지부 조합원들이 주로 지키고 있었는데,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담요를 덮고 소변을 볼 정도였다.
본회의 예정 시각까지 등원에 성공한 이들은 새누리당과 무소속·교육의원까지 포함하면 18명에 불과했다. 전체 의원은 57명(새누리당 39명, 민주개혁연대 11명, 기타 무소속·교육의원)인데, 민주개혁연대를 제외하면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등원했던 의원들은 의회 건물 3층에 있는 방청석으로 가서 민주개혁연대 의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김오영 의장은 민주개혁연대에 세 차례에 걸쳐 농성을 풀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질서유지권 발동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는데, 김 의장은 행사하지 않았다. 등원에 실패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경남도청에 모여 있었다.
잠정합의안 도출됐지만, 새누리당 의원 이견
이날 오후 경남도의회 김오영 의장과 새누리당(대표 강석주)·민주개혁연대(공동대표 김경숙·석영철) 대표들은 안건을 상정하되 2개월 뒤인 6월에 임시회를 열어 처리하기로 잠정합의했다. 하지만 최종 타결에는 실패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의회 건물 안에 있었던 의원들은 대체로 잠정합의안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지만, 등원에 실패했던 의원들은 정반대였다. 등원했던 새누리당 황태수 의원 등이 나서서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야당 당원 등 300여 명은 밤 늦게까지 계속 자리를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도의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속에 등원하지 못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잠정합의안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이 모두 도의회 건물 안에 모여 논의하는 기회를 주기로 했던 것이다. 김재명 민주노총 경남본부장과 유지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석영철 민주개혁연대 공동대표가 나섰다.
이날 본회의가 열리지 않으면 어렵게 만들어 놓았던 잠정합의안이 무효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 본부장 등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새누리당 의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자고 호소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남도청에 모여 있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등원하지 않겠다고 했고, 경남도의회 건물 안에 있었던 새누리당 의원들도 하나둘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주개혁연대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잠정합의안을 받아들이도록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정 무렵 김오영 의장을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도의회 건물을 나왔다. '진주의료원 폐업 조례안'을 다루기로 했던 임시회는 '자동유회'된 것이다. 이로써 잠정합의안도 없던 이야기가 된 셈이다.
경남도의회의 다음 회기는 5월 9일이다. 그런데 김오영 의장과 새누리당·민주개혁연대 대표는 4월 29일 임시회를 다시 열기로 합의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날 다시 임시회를 열어 진주의료원 폐업 안건 처리를 다시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개혁연대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야당 당원, 시민들은 자정 넘어서까지 경남도의회 주변을 지켰다. 임시회 본회의가 '자동유회'된 뒤 석영철 대표는 현장에 나와 "좋은 성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해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그는 "지난 2월 27일부터 투쟁을 지속해 왔고, 10일간 단식농성에 이어 본회의장 봉쇄투쟁을 벌였다"며 "잠정합의안을 이루어냈지만 타결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의장과 새누리당 대표와 4월 29일 임시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동유회' 뒤 황태수 의원(새누리당)은 기자를 만나 "자동유회로 간 것은 새누리당 의원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아침에 등원과정에서 노조원들로 부터 야유를 받고 등원이 막히면서 모멸감을 느꼈다"며 "긴급 임시회의 소집을 요구할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르면 주말이라도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개혁연대 소속 이천기 의원(통합진보당)은 "잠정합의안이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잠정합의안에 기초해서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고민을 해봐야 한다"며 "완벽한 합의는 아니지만 여야가 이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철수 여부는 대표단이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는 만큼 논의가 끝난 후에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과 홍준표 지사가 전적 책임, 사죄해야"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새누리당과 홍준표 경남지사한테 책임을 돌렸다. 허성무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새누리당의 무책임함에 유감"이라며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음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의 이견으로 타결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안건 처리가 유예되어 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며 "새누리당과 홍준표 지사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도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은 "새누리당 의원들은 오늘 민주노총 조합원한테 수모를 당했다고 하는데, 지난 12일 상임위에서 날치기 처리하며 동료 의원들을 밀치고 폭력을 행사했던 것에 대해서는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남도청 현관 앞에서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농성하다 병원에 입원한 장영달 전 국회의원은 "의료원 문제를 갖고 홍준표 지사와 경남도, 경남도의회가 도민들을 우롱하는 행위를 계속해서는 안된다"며 "이번 유예 국면을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하고, 더 도민들을 우롱한다면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영명 보건의료노조 정책실장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 노사대화가 열렸는데, 오늘 결과와 상관없이 대화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권종 부위원장은 "이번 기회에 국민들이 공공의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런 차원에서 홍준표 지사가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최 부위원장은 "이번 기회에 지방의료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과 관련한 제도가 자리 잡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지방의료원 원장 임명은 단체장이 기관장 임명하듯 해오면서 사유물처럼 되었는데, 이를 바로 잡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기 통합진보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책임있는 지위의 사람이 소통을 하지 않고 고집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이번 투쟁은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했다.
서소연 진주시민대책위 공동대표는 "홍준표 지사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 보니 생긴 문제이고, 슬기롭게 해결되어야 한다"며 "이번 사태를 보면서 홍준표 지사한테 도정을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 걱정이 든다"고 말했다.
차윤재 경남대책위 공동대표는 "민주노총 조합원 등 시민들이 오늘 나와서 시민의 힘을 보여주었다"며 "도의회가 도민의 대의기구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고공농성, 봉쇄농성 등 투쟁 계속... 23일만에 단식 풀어박석용 보건의료노조 진주의료원지부장과 강수동 민주노총 진주지역협의회 의장은 지난 16일부터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경남도청 신관 옥상 방송철탑에서 고공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경남도의회 민주개혁연대는 본회의장 봉쇄투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경남도청 정문 옆 천막에서 3월 27일부터 4월 18일까지 23일째 단식농성해온 진주의료원 팀장·수간호사 강종순·조미영씨는 단식을 풀었다. 강종순씨는 17일 밤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진주의료원에는 환자 20여 명이 입원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