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은 상처투성이로 남은 땅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곳도 드물다. 서울 용산에 가면 '전쟁기념관'이 있다. 하지만 그 전쟁기념관도 전쟁을 철원처럼 사실적으로 '기록'하지는 못한다. 철원은 살아 있는 전쟁기념관이다. 전쟁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도 없다.
철원에 가면, '전쟁'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휴전선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철원에서는 '한국전쟁'이 전쟁이 진행되던 당시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철원에는 한국전쟁 이후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장소가 여러 곳이다. 그곳에서는 전쟁이 결코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기념관보다 더 많은 '전쟁의 역사'를 간직한 땅
요즘처럼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된 때도 드물다. 이러다 철원이 우리의 또 다른 미래가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이럴 때 '전쟁기념관 철원'을 한 번이라도 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래에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전쟁이 철원에 남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에 남북 간 대치 국면이 지속되고 전쟁 위협이 고조되면서 철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줄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철원이 우리의 미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탓에 그 불안한 미래로부터 좀 더 멀리 떨어지려는 심리가 작용한 탓일 게다.
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똑똑히 기억해 둬야 하는 것이 과거다. 그 과거에 미래로 통하는 길이 있다. 과거 상처투성이로 남아 있는 길을 되풀이해서 걷지 않으려면,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철원은 자전거여행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자전거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인도나 도보여행 길과 겹쳐 있어, 자전거만 통행이 가능한 길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일반도로 역시 자전거에게 그리 친절한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로에 갓길이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해도 모래나 흙 같은 이물질로 덮여 있기 일쑤다. 철원에서 자전거여행을 할 때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떠나야 한다. 철원에서는 '길'을 탓하지 않는 자만이 여행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아참, '전쟁기념관'에서 '기념'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한 예에 속한다. 상처뿐인 전쟁을 '기념'까지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그 이름은 '전쟁역사박물관'이나 '군사박물관'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는 게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하지만, 철원은 그 지역 전체가 60여 년 전에 입은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거대한 전쟁역사박물관이다.
여행은 승일교에서 시작해 백마고지역에서 끝난다. 승일교에서 백마고지역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가지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길이 다르다. 중간에 어떤 길로 어디를 거쳐서 갈지는 모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자유다. 다만 자동차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찾아 가려면, 사전에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소한 이름의 지게부대, 승일교 건설에 동원되다승일교는 남한과 북한이 절반씩 건설한 독특한 다리다. 기초공사와 교각 등 다리의 절반은 북한이, 나머지는 남한이 만들었다. 그렇다고 남북 합작은 아니다. 철원은 38선 이북에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북한 땅에 속했다. 전쟁 전에 북한에서 먼저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전쟁 중에 다리를 버리고 떠난 북한 대신 남한이 마저 다리를 완성했다.
전쟁 중에는 목조로 가설한 다음, 전쟁이 끝난 후인 1958년에 가서야 콘크리트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리 양쪽이 각각 다른 양식으로 건설된 것을 볼 수 있다. 전투에 병력을 투입하는데도 사람이 모자랄 판에 다리는 또 어떻게 건설했을까? 전쟁에는 군인들만 참여했던 것이 아니다.
이 다리를 건설하는데는 철원 지역의 민간인들로 구성된 '지게부대'가 동원됐다. 지게부대라니, 별 이상한 이름의 부대가 다 있다. 하긴 난리 통에 군대가 '지게'라고 그냥 놔뒀을 리가 없다. 그때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동네 부지깽이라도 동원해야 할 판이었다. 실제 한국전쟁에는 '곡괭이부대'라는 이름의 부대도 있었다. 곡괭이부대는 참호나 교통호 파기, 진지 구축 등의 임무에 투입됐다.
지게부대는 전쟁에 동원돼, 교량과 도로를 보수하는 데 투입되거나 탄약이나 보금품 등의 군수물자를 나르던 민간인 조직을 일컫는다. 한국은 산악 지형이 많은 탓에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데 지게가 꽤 유용하게 쓰였다. 한국군은 1950년 7월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따라 민간인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쟁 기간 동안, 10대 후반의 소년에서부터 60대 노인들까지 20만 명에서 30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징발됐다. 그들 중엔 "길가다 느닷없이 잡혀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군수물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부상자와 전사자를 후송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이들은 때로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날라야 했다.
지게부대 역시 전쟁 중에 상당한 희생을 치렀다. 지게부대에 투입된 민간인 중 1만여 명 이상이 숨지거나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보다 더 큰 희생을 치렀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때로 전투에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이들이 전쟁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게부대는 어디에서도 그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게부대를 운영한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 공적을 따지는 일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흐지부지 흩어졌다. 이들은 아마도 전쟁 중에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리도 제 구실을 잃었다. 승일교 옆으로, 철제 아치를 올려 세운 육중한 한탄대교가 지나가고 있다. '승일교'라는 이름은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에 전사한 '고 박승일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와 남과 북이 함께 만들었다는 의미로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다리는 그 기능을 잃었지만, 그 다리를 건설한 역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육군대장 박정희 전역지'를 관광지로 만든다고? 승일교에서 군탄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승일공원 입구에서 길을 건넌 다음 순담계곡을 지나가는 긴 언덕길을 오른다. 이 길은 자동차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 자전거 타기 좋은 길이다. 그런데 언덕이 조금 긴 게 흠이다. 숨이 매우 가쁘다. 순담계곡을 지나 긴 언덕을 내려오면, 군탄사거리다. 군탄공원은 그곳에서 길 건너 북쪽으로 100여 미터 올라간 지점에 있다.
군탄공원에 '육군대장 박정희 전역 기념비'가 있다. 이 공원은 최근 공원 이름을 '박정희 장군 전역지 공원'으로 되살린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이다. 이 공원의 원래 이름은 '박정희 장군 전역지 공원'이었다. 이 공원이 군탄공원이 된 것은 노태우 정부 때다. 6월 항쟁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박정희도 그 빛을 잃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공원 이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독재자 박정희'를 되살리는 작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박정희 되살리기는 그 유례가 사뭇 깊다.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로당에 가담했던 전력 때문에 입지가 크게 약화돼 있었다. 사회적으로 사실상 매장이 돼 있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군인으로 재기하는 행운을 얻었다. 기사회생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이 박정희에게 천운이나 다름이 없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그 후 그가 1961년에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5·16 군사쿠데타는 국민을 상대로 한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었다. '정권'은 그 전쟁에서 박정희가 국민들에게서 빼앗아간 전리품 중에 하나였다.
'지게부대'와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잊혀져 가는 마당에, '박정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도 문제다. 철원에서 이 공원 이름을 되찾는 데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평가하기에 앞서, 그가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남긴 공과를 평가하는 데 이견이 많다고 해서, 그가 이 세상에 없었던 인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옹색하기 짝이 없는 논리지만, 그에 맞서는 논리 역시 큰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원 명칭 복원을 추진한 사람들은 공원 이름을 되살리면서 이 공원을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군탄공원에는 오로지 육군대장 박정희가 전역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념비 하나만 서 있을 뿐이다. 그런 장소를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과거 전력에 엄청난 오점을 남긴 한 군인이 어떻게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딸까지 대통령이 되는 일은 또 얼마나 가능했을까? 어찌됐든 우리는 지금 그의 딸이 대통령인 세상에 살고 있다. 공원 명칭을 되살리는 일은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군탄공원에서 나와 철원 읍내를 향해 달려가는 길에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들린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부르르 떨린다. 방심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포성이 울리는 바람에 자전거 핸들까지 놓칠 뻔했다. 때가 때인지라 느닷없이 들려온 포성에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들을 놓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근처에 야포 사격장이 있었다. 철원에서는 거리에서 포성이나 총성이 들리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요즘은 도로 위에서 훈련 중인 군인들과 군용 차량을 보는 일이 더 흔해졌다. 최근에 개성공단을 오가는 길이 폐쇄되고 남북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으면서, 군인들의 훈련 강도가 더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철원을 여행하던 중에 어디에선가 귀를 찢는 듯한 포성이 들려온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철원 읍내는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다. 여행은 계속된다. 전쟁역사박물관은 이제 겨우 그 일부만을 들여다 봤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전편(1/2)입니다. 다음에 후편(2/2)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