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픈 사랑은 연인의 마음을 직시하여 그 심연의 상처를 한없이 어루만지다가, 곱디고운 위로의 말을 살며시 포갠다. 강정을 '그대'라고 부르는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의 연서를 담았다. 책의 제목은 <그대, 강정>이다.
강정은 예로부터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제주민들은 '일강정', '이번내'(화순), '삼도원'(대정읍 신도)이라 하여, 강정을 살기 좋은 첫 번째 마을로 꼽았다. 귤나무가 자라는 예쁜 마당을 가진 집들 사이 돌담을 따라 10여분 걸어 닿는 해안엔, 1.2km에 이르는 거대한 통바위인 구럼비라 불리는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바위 곳곳엔 용천수가 솟아나와 하루 일과에 지친 해녀의 몸을 씻기고, 붉은말말똥게, 맹꽁이 등 뭇 생명들을 품는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 유독 강정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서귀포 식수 공급량의 70%를 공급하고, 계절마다 은어가 찾아오고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한가로이 거닌다. 강정천을 따라 한라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청록빛 연못 냇길이소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맞은편 섭섬과 문섬, 밤섬의 풍광을 두른 강정 바닷가에선 운만 맞으면 파도 위로 뛰노는 돌고래도 볼 수 있었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전까진, 그랬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고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 강행되고, 6년간 이어온 투쟁이다. 주민과 활동가에게 5억 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되었고, 연인원 670여 명이 연행, 구금되었다. 구속 수감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른다. 작년 봄이 시작되던 3월 7일, 해군은 구럼비 발파를 시작했고, 강정 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투쟁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사이렌이 울리면 대치와 고착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대나무 장대에 달린 노란 깃발은 오늘도 강정을 지키고 있으며, 중덕 삼거리에 위태롭게 선 망루는 저 멀리 발파된, 지금도 발파되고 있는 구럼비를 아득한 시선으로 염원하고 있다.
제주의 슬픈 운명에 안부를 묻다
이 책은, 다시 만개하던 봄의 계절, 2013년 4월 3일 출간되었다. 작가들은 제주의 운명을 가슴에 품어 무애의 필치에 꾹꾹 눌러 새겼다. 제주의 상처는 오래되어 깊고 깊다. '일본제국주의가 다녀간 자리에 미국제국주의가 자릴' 잡고 제주를 침탈하고 살육했다. 제주민의 1/3이 희생된 4·3 항쟁의 상흔은 아직도 처연한데, '제주도 군사기지 프로젝트'란 이름의 야만은 기어코 강정을 짓밟고 세화, 성산, 대정, 산방산을 차례대로 군사기지화 하려고 한다.
이 험한 세월에 시인 김근은, 제발 '그대, 강정'이 무사하길 기원한다.
당신, 무사한가요. 저는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봄이 이제 막 도착하는 그곳에서 구럼비 검은 바위들과 함께 우뚝우뚝 힘을 내고 있을 당신께 언제까지고 무사한가요, 물을 겁니다. 당신과 내가 무사할 날을 위해서. 무사히 돌찔레 한 송이 이 봄에도 피워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사하기 위해서, 평화롭기 위해서. 당신, 무사한가요.(30쪽)작가들은 또한 스스로 '육지 것'이 되어 마치 죄인처럼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 시인 박형준은 '한때 마음속에 이상으로 남겨 두고 싶은 섬',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낭만의 섬'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동경의 장소였던 제주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시인 김희정은 기껏 육지에서 강정 소식만 애닯게 듣고 안타까워 할 뿐인 자신의 '비겁하고 용기 없는 일상'을 원망한다.
시인 전영관은 스러져가는 강정의 슬픔을 목도하며 '사랑한다, 미안하다'고 읊조리듯 고백한다. 그리고 생채기난 연인의 몸둥아리를 보듬어, 이젠 '그대'와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
다할 것 없어 아름다운 그대의 안위를 보호하겠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바깥에서 번지는 눈물이지만 어깨 겯고 체온을 나누듯 함께여야만 한다. 그대의 허리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지고 늑골 사이마다 거친 발자국이 찍혀도 끝장은 아니다. 눈물로 염장된 내력이라서 누대를 두고도 지속될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강정, 제주.(183쪽)희망은 기적을 모색한다대추리와 매향리, 용산참사, 두리반과 마리, 재능교육,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두물머리와 내성천, 영주댐을 둘러 강정까지, 시인 송기역은 '가느다란 빛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평화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지구별 어디에도 외부인이란 없습니다.(109쪽)그 빛을 따라 걸었던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를, 시인 김은경은 이렇게 추억한다.
신부님은 늘 비 내리는 한가운데에 계셨지요. 빗속에 선 사람에게 우산 하나 내미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음으로써 기꺼이 고통을 함께 하셨지요. 지금 이 비는 생명을 살리고, 숨을 틔우는 비가 아니라 폭력과 살육을 부르는 공포의 비입니다. 그 무지막지한 빗줄기에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었고 아름다운 올레길이, 붉은발말똥게와 연산호 군락지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심정은 비바람에 갈가리 찢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방패막이를 하고 계십니다.(50쪽)그리고 시인 김선우는 문정현 신부에게서 움튼 작은 기적을 주목한다. 문정현 신부는 지난해 4월 초, 강정 마을 방파제 7m 아래로 추락했다. 모두가 불길한 비극을 예감했지만, 노 신부는 입원 13일 만에 일어나 다시 강정으로 돌아왔다. 사고 당일, 포구에서 기도할 때 쓰던 깔개가 바람에 날려 방파제 밑에 '먼저' 떨어져 있었고, 그 깔개가 노구의 사제를 받아내었던 까닭이다. 시인은 이 작은 기적을 이렇게 회고한다.
칠십 노구의 사제를 받아 낸 그 기도용 깔개에 대해 생각합니다. 고마워해야 할 것들은 대개 이렇게 바닥에 있는 것들이더군요. 어쩌면 기적은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42쪽)시인의 희망은 결코 멈출 생각이 없다. 기어코 또 다른 기적을 모색한다.
이 땅의 작가들은 강정 마을을 책으로 포위하려고 합니다. 무기와 군함이 아니라 책으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군대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축제로! 강정 마을 전체를 평화의 도서관으로, 평화의 책마을로 만들려는 꿈이 시작되고 있는 여기가, 또 한 번 기적의 자리입니다. 맨 밑바닥에 무릎을 모은 기도용 깔개 위로 강정의 노을이 지고 또 태어납니다. 어서 오세요, 당신도 함께해 주세요.(44쪽)기적을 향한 희망의 연대, 그 시작
작가는 무릇 시대를 앓는 사람이다. 숱한 연민은 애끓는 고통으로 자승자박하여 마침내 숭고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그렇게 잉태된 문학은, 시대의 슬픔을 치유한다. 작가의 영민한 시선은, 폐허의 참상을 딛고 극복할 희망을 탐색하고 통찰하고 선동한다. 412명의 작가가 동참한 강정 평화책마을의 베이스캠프인 <평화책방>이 지난 4월 6일 문을 열었다. 기적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간다.
이 책의 인세와 출판사 수익금 일부는 '제주 팸플릿 작가'의 팸플릿 제작비와 강정 평화활동에 쓰인다고 한다. 이 책은 기적을 향한 희망의 연대, 그 시작일 뿐이다. 작가들은 평화책마을로 해군기지를 에워싸고,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작가들의 번뜩이는 문장은 나 같이 먼곳에서 그저 마음 조리며 강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추동할 것이다.
책의 갈피마다 자리잡은 사진 작가들의 작품은, 강정과 구럼비,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얼굴을 가식 없이 담아낸다. 그들과 수줍게 눈 맞추며, 나의 마음은 어찌 할지 모를 난처함으로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만다. 연애의 감성이 가슴을 북돋는다. 큰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블로그(http://soli021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