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인물이 계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물을 읽다보면 '작가는 왜 이런 인물을 만들어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마이클 코넬리가 창조한 인물 '해리 보슈'도 그런 호기심의 대상이다. 해리 보슈는 지금까지 18편이 발표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처음에는 형사로 데뷔했다가 이후에 사립탐정으로 변한다.
해리 보슈의 독특한 점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그의 과거다. 해리는 경찰이 되기 전에 베트남에서 '땅굴쥐'로 군 복무를 했었다. 좁고 어두운 땅굴속을 기어 다니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 때로는 사방에서 적들이 출몰하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밤을 꼬박 샌 적도 있었다.
이런 군복무 경험은 해리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인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범죄소설의 주인공에게 강인함은 필수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에게 이렇게 어둡고 힘든 과거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을까.
해리 보슈 탄생의 일화이에 대한 대답은 작가인 마이클 코넬리에게 직접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미스터리 마니아 오토 펜즐러가 엮은 책 <라인 업>에서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밝히고 있다.
마이클 코넬리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 앞에는 낡은 터널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높이는 150cm가 채 되지 않고 길이는 약 12m 가량의 터널이다. 그 안에는 건물에서 떨어진 벽돌과 회반죽들이 쌓여있고, 천정에는 배배꼬인 온갖 식물의 뿌리가 튀어나와서 터널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움켜 잡을 것만 같다.
동네에 살고있는 남자아이라면 이 터널을 혼자서 통과하는 것이 일종의 의례였다고 한다. 어둡고 습한 터널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도 역시 이 의례를 거쳤지만, 그 이후에도 이 터널은 종종 꿈에 등장할 만큼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터널에서 해리 보슈가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서 터널을 통과한지 수십 년 후에, 해리 보슈 역시 베트남의 땅굴속을 헤메고 다니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악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리 보슈에게 그런 과거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미제 사건을 뒤쫓는 탐정2003년에 발표된 <로스트 라이트>는 '해리 보슈 시리즈'의 아홉 번째 편이다. 전편인 <유골의 도시>에서 해리는 30년 가까이 근무했던 경찰국에 사표를 제출하고 자유의 몸이 된다. 수사력은 뛰어났지만 경찰국 내의 '정치'에는 젬병이었던 해리였으니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형사 생활은 그만뒀지만 형사 시절에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들, 특히 해결되지 못한 미제 사건들은 여전히 해리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해리는 그 중에서 4년전에 있었던 안젤라 벤턴 사건을 떠올린다.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살해당한 사건으로 아직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게된 해리는 이 살인사건의 진상을 다시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시리즈를 읽다보면 해리 보슈는 고독하면서도 사색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특별히 만나는 이성도 없다. 언제나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거기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런 습관도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땅굴 속에서 오직 자신의 감각만을 의지하며 작전을 수행했을테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해리 보슈가 탄생한 그 터널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용기를 얻었던 작가의 기억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터널을 통과해서 나온 해리 보슈의 활약도 그만큼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해리 보슈를 좋아하는 모든 독자들의 바람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로스트 라이트> (마이클 코넬리 지음 |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 | RHK | 1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