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자연 앞에 서면 우리의 표현력은 얼마나 궁한가? "그림 같다"는 말은 자연에 대한 모독이다. '스스로 그럴듯한' 자연(自然)이 거기 있을 뿐이다. 허물어진 옛집과 오래된 철길마저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듯한 풍경 속으로 앙증맞은 열차가 들어간다. 협곡(Valley)의 머리글자를 따 '브이트레인(V-train)'이라 부르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경북 봉화군 분천역과 강원 태백시 철암역 사이를 하루 세 번 왕복한다.
앙증맞은 기차로 떠나는 '시간여행'
협곡의 절경들은 대형 유리창마다 병풍처럼 한 장씩 들어왔다가 뒤로 밀려난다. 협곡열차는 시속 30km로 달리는 저속열차다. 이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차를 발명해 놓고 이제야 느림의 가치를 깨달은 걸까? KTX가 달리는 초스피드 시대에 협곡열차는 시간을 다투지 않으니, 쏜살같이 지나가던 풍경들이 한참 시야에 머문다.
화전민들이 가꾸던 묵은 밭뙈기와 흙벽돌로 지은 담배건조실 같은, 풍경의 소품들은 흘러간 시간을 기억하게 한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영암선(영주~철암)을 달리며 과거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27.7km 철로에는 화전민의 삶과 광부들의 애환이 곳곳에 서려 있다.
진달래꽃이 산허리를 감싼 계곡 아래 바위들 사이로 물소리가 우당탕 휘돌아나간다 싶더니, 산굽이를 돌아서자 어느새 물이 고여 거울 같은 소(沼)가 나타난다. 물속에 거꾸로 잠긴 신록에도 벚나무며 조팝나무 등이 꽃으로 수를 놓고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가 근처라는데, 이 청정수가 인간이 만든 도시를 거치면서 더러워진 것인가?
우울한 생각도 잠시뿐 눈앞에 펼쳐지는 차창 밖 풍경에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눈을 떼지 못한다. 절경을 놓칠세라, 놀라워하는 아이들 표정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어른들 손길이 바쁘다. 경기도 성남에서 왔다는 이종찬(69)씨는 옆에 앉은 부인의 손을 멋쩍게 잡으며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연애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어두침침했던 비둘기호와 달리 이 기차는 화사해서 마음에 드네요. 특히 창문이 커서 풍경 보기가 좋습니다."
협곡열차는 '복고'를 모티브로 했지만, 시설은 신식이고 내·외부와 좌석 등을 알록달록하게 칠했다. 다만 에어컨이나 히터 대신 목탄 난로와 선풍기를 설치해 옛 기차의 모습을 남겨뒀다.
간이역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협곡열차가 정차하는 간이역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봉화의 분천역은 '춘양목'이라 불리는 금강소나무를 대량으로 반출하던 곳이다. 줄기가 곧고 단단해 궁궐이나 절을 지을 때 많이 사용했는데 지금도 봉화 일대에는 불그스름한 껍질에 미끈하게 뻗은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양원역에 도착하면 2평 남짓한 아늑한 대합실이 눈에 띈다. 1988년 이곳 주민이 손수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페인트로 '양원역 대합실'이라고 썼단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양원역에 내리면 5분의 정차 시간이 아쉽다.
양원역을 뒤로하고 승부역으로 가는 철로에는 터널과 다리가 유독 많다.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가는 까닭이다. 터널을 지날 때 열차 안은 어두워지지만, 별다른 조명이 켜지지 않는다. 그 대신 천장에 별자리 야광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아이들은 "와, 별이다!"라고 외친다. 두 아이와 함께 대구에서 온 박옥희(35∙여)씨는 "다른 기차와 달리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고, 열차 승무원이 진행하는 퀴즈 등 이벤트들이 있어서 아이들이 즐거워한다"며 만족해했다.
'승부역은/하늘도 세평이요/꽃밭도 세평이나/영동의 심장/수송의 동맥이다'
승부역에 도착하면 바위에 새겨진 시가 눈에 띈다. 1960년대 승부역의 한 역무원이 지었다는 이 짧은 시에는 승부역의 역사가 담겨있다. '세평'이라 표현할 만큼 작은 역이지만, 강원도의 석탄을 실어 나르며 산업철도의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비룡산과 오미산 등 태백산 자락에 둘러싸인 승부 주민에게는 도시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돼 줬다.
승부에서 철암으로 향하는 철로는 과거로 회귀하는 여행길이다. 산등성이에 있는 화전민의 집터와 논밭, 담배건조장, 광부들이 살았을 법한 판잣집에는 과거의 시간이 머물러 있다. 태백시 철암은 한때 성시를 이루고 북적거리던 장소였기에 더욱 쓸쓸해 보인다.
"한 때는 여기 3만이 북적댔는데..."'빈손으로 찾아온 팔도의 사람에게 쉬 희망 한 보따리 얹어주고 결국 배신만 남은 땅, 희망의 종착점이 아닌 정거장 혹은 간이역으로 우리네 가난한 삶의 기억을 차지한 도시'시인 정연수는 <꿈꾸는 폐광촌> 시집 머리에서 태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협곡열차의 종착지인 철암(鐵岩)은 '쇠바우'라는 말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다. 옛사람들은 철암 북쪽 백산 근처에 있는 누런 바위를 녹여 쇠를 얻었다고 한다.
철암은 광활한 석탄산지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조용한 마을 철암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30년대, 삼척탄전과 태백탄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석탄운반을 위한 철도가 필요했고 1939년 철암역이 개통됐다. 이어서 강원탄광(이후 강원산업으로 개명)이 대규모로 개발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차례로 폐광되면서 마을도 텅 비고 말았다. 어느 주민이 철암역 담벼락에 쓴 글귀가 폐광촌의 '좋은 시절'을 전해준다.
'석공 배지 달고 다니면 대우받던 시절이 있었다. 60~70년대 월급 많이 받던 시절 30만 원 받았다. 70년대 이후 이 일 저 일 해봤지만 그래도 석공 시절이 좋았다. 60년대 후반까지 광산 사원증 가지고, 장가가기 좋았다. 그 당시 수입이 안정적이라 마냥 놀고먹고 살았다. 탄광은 생산이 목적이라 사람이 죽고 사는 거는 문제도 아니다.'철암역 앞 점포들은 이제 자물쇠가 굳게 채워진 채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다. '궁원 다방' '젊음의 양지' '미백화장품' 등 빽빽이 늘어선 간판들만이 북적대던 30년 전 철암을 짐작하게 한다. 해질 무렵 탄광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와 발 디딜 틈 없던 거리에는 이제 쓸쓸함만 남았다. 폐허나 다름없는 거리를 따라 걷다 철암시장에 들어섰다. 시장 역시 타고 남은 연탄재들이 여기저기 뒹굴 뿐 방문객이 뜸한 탓인지 개들도 짖어대며 일행을 대했다. 그나마 열에 하나 문을 연 가게주인들도 웬 일이냐는 듯 방문객들을 쳐다봤다. '백미세탁공장'을 운영하는 권완용(65)씨는 철암의 영고성쇠를 빠짐없이 지켜본 목격자다.
"이 철암 반경 1km 안에 좌우간 3만이 살았으니까. 저 산이 다 집이었지. 나이 스무 살 안팎의 영계들이 십 수명씩 북적대는 방석집이 즐비했어. 우리집 옆 골목에는 노상 오줌 싸제끼고 '오바이트' 해대고 그랬는데 그것도 그립네."모두가 떠나도 못 떠나는 사람들탄광촌 노동자들이 목구멍에서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매일같이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으니 시장이 온통 흥청거릴 수밖에. 돈 잘 벌고 잘 쓰는 광부들 곁에는 여자들도 많았다. 다방과 미용실도 잘 됐고, 권씨도 여자들의 화려한 한복을 세탁하며 꽤 돈을 벌었다.
지금은 30개 점포만 겨우 남은 철암시장은 원래 점포가 300개 정도 있는 큰 시장이었다. 석탄경기가 좋아 시장통에 자리를 펴면 돈을 버는 건 시간문제였다. 권씨는 바닥에 벽돌을 박아 한두 평씩 구획된 좌판터를 가리키며 당시 경기가 얼마나 흥청댔는지 설명했다.
"이게 좌판이야. 이 자리 하나에 100만 원씩 했어. 30년 전 얘기지. 우리집 장부보면 100만 원씩 매년 계약했어. 이 자리 하나만 가지면 공무원 봉급보다 나았다니까. 하여튼 여기가 대한민국 강원도 최고의 시장이었어."사람들이 떠나버린 철암은 온기를 잃고 회색으로 식어가는 연탄을 닮았다. 협곡열차에서 내린 관광객들 눈에 철암은 어떻게 비칠까? 기분 좋게 기차를 탔던 사람들에게 철암은 희망적인 종착지는 아닐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린 '유령의 도시'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암은 추억으로만 남게 될 과거의 도시가 아니다. 이곳을 떠날 수도 없고 떠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협곡열차가 부려놓는 승객들이 회색 마을에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