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에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대사관 인턴여직원 성추행으로 전격 경질된 문제로 10일 언론과 SNS가 뜨겁게 달궈지며 여론이 들썩였다. 이에 청와대는 이날 늦은 밤 "국민과 대통령께 사과드린다"고 발표했으나, 소위 '셀프사과'로 후폭풍도 거세다.
그런데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 속에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에서 한 약속 가운데 중요한 문제가 파묻히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바로 '통상임금'에 관한 박 대통령의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야당은 물론 경제연구소, 특히 변호사단체와 현직 부장판사 등 법조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먼저 지난 8일 한미 최고경영자 라운드테이블에서 댄 애커슨 GM(제너럴모터스) 회장이 "한국에 8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려면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며 박 대통령에게 대놓고 '민원성' 카드를 내밀었다.
박 대통령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고 한국 경제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꼭 풀어나가겠다"며 "지엠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대한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민희 "대통령이 노동자 임금 삭감 약속은 큰 문제"
그러자 최민희 민주당 의원은 9일 트위터에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노동자들 임금 깎아 주겠다고 방미 중 약속한 것 큰 문제인데... 윤창중 성추행으로 덮여버렸다"고 안타까워하며 "그 약속장면은 대한민국 시계를 1970년대로 돌려놓았다. 내가 하면 다 된다는 생각 아니면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개탄했다.
이재화 "박근혜 대통령은 재벌과 외국자본의 대통령인지 의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회 위원인 이재화 변호사도 10일 트위터에 "박근혜 대통령의 '통상임금 문제, 꼭 풀 것' 발언은 외국자본 투자 유치를 위해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을 포기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라며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재벌과 외국자본의 대통령인지 의심스럽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정렬 부장판사 "대법원 법리 뒤집겠다는 취지로 해석"현직 부장판사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물론 법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의견표명이 아니다. 트위터 팔로워들과의 사적인 공간에서의 대화에서 답변형식에서다.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11일 트위터에서 "윤창중이 문제가 아니라, 통상임금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라는 문제제기와 '통상임금'에 대해 궁금해 하고 어려워하며 묻는 팔로워들에게 '통상임금'에 대해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례와 헌법상 3권분립제도 의의를 설명하면서 "대통령님의 위험한 말씀"이라고 우려했다.
이 부장판사는 트위터에 먼저 "정리하자면... 현행법의 해석상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됩니다. 그런 당연한 법리를 대법원에서 확인한 것일 뿐"이라며 "대통령님의 말씀은 이 법리를 뒤집으시겠다는 취지로 해석됩니다"라고 추론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확정판결을 대통령이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현행법상 없습니다. 헌법상의 3권분립제도 때문"이라며 "결국 대통령님의 말씀은 헌법상의 3권분립제도를 염두에 두시지 않은 위험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 부장판사는 "확정판결에 의한 법리를 굳이 바꾸려면 법률을 개정해야 되는데, 기존에 발생해 있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지 않는 내용이라면, 이것은 기존 법률관계를 부정하는 내용의 소급입법에 해당된다"며 "소급입법은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시키려는 말씀이나 조치는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만들 수 있어 문제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소정 근로 또는 총 근로의 대상(대상)으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으로서 그것이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것'을 통상임금으로 해석하는 대법원의 판례는 아주 오래전부터 확립된 것"이라며 "그 판례에 따른 법리를 지금 바꾸어야 할 특별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민변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기업의 민원 해결사인가?"민변 노동위원회(위원장 권영국 변호사)는 10일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기업의 민원 해결사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거친 돌직구를 던졌다.
민변은 "GM 회장의 발언은 한국GM노조가 한국GM을 상대로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해 1, 2심에서 승소하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사안과 관련이 있다"며 "GM 회장은 대규모 투자의 선제조건으로 1, 2심에서 패소한 자사의 통상임금 문제를 두고 타국의 대통령에게 민원을 제기한 셈"이라고 GM 회장의 의도를 풀이했다. 한국GM은 노조와의 통상임금 소송 1, 2심에서 패소해 현재 인건비 8140억원을 장기 미지급 상태로 알려져 있다
이어 "미국 기업 회장의 말 한마디에 일국의 대통령이 1800만 자국 노동자의 권리가 걸린 근로조건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발언은, 참으로 받잡기 민망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고 개탄하며 "한국의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전체 봉사자이지, 미국 GM기업의 봉사자가 아니다"고 질타했다.
민변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수백 일에 걸쳐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파괴 등 긴급한 노동현안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쳐온 노동자들의 요구는 철저히 외면하다가 미국 기업 회장의 민원성 한마디에 즉각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태도는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의구심을 나타내며,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기업의 민원 해결사인가?"라고 맹비난했다.
또 "대통령 후보 시절 국정조사를 약속했던, 정리해고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사내하청 불법파견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들이 송전탑에 올라가 외쳐보아도 '딴' 나라 일처럼 외면해왔던 그가 미국 기업 회장의 말 한마디에 1800만 자국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한 통상임금의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답변하는, 신속하고도 단호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며 "미국 기업은 우리의 희망이고, 자국 노동자는 봉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어 "또한 통상임금 문제는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통상임금을 규정한 근로기준법령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과 입법적인 해결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통상임금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정기적 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고정적인 임금이라면 통상임금이므로 분기별로 지급되는 상여금과 1년 근속당 일정금액을 지급한 근속가산금 또한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따라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통상임금 문제를 미국기업의 요구에 따라 꼭 풀어나가겠다고 한 약속은 사법부의 판결을 무위로 돌리겠다는 것으로 삼권분립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민변은 "박근혜 정부가 최고의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우선 기업들의 초과근로부터 제한해 실질 근로시간을 단축시켜야 하고, 초과근로시 산정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의 수준을 올림으로써 초과근로에 대한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켜야만 초과근로 수요억제로 인해 진정한 근로시간 단축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고 해법을 제시하며 "초과근로가 줄어야 그 만큼의 신규채용 일자리가 발생할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민변은 끝으로 "미국 대기업에 대한 대통령의 통상임금 해결 약속은 절차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약속한 일자리창출과 장시간 근로시간 단축 정책에도 배치되는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며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당 "사법부 판단에 영향 미치려는 제왕적 태도이자 헌법의 삼권분립 위배"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도 10일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미국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통상임금 산정기준' 문제에 대해 '꼭 풀어 나가겠다'고 밝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며 "대법원이 확정 판결해서 이미 시행중인 통상임금 산정기준에 대해서 박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단에 반하는 입장을 밝힌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배 대변인은 "기업들은 통상임금 산정 때 정기 상여금이나 보너스를 포함하지 않았으나 법원은 이를 포함해 산정해야 한다고 잇따라 판결하고 있다"며 "이는 신규인원 채용 대신 기존인력에게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며 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잘못된 고용관행에 대해 사법부가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는 "대통령이 이같은 사법부의 고심을 외면하고, 외국기업의 투자를 명분으로 기업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하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며 "특히 대통령의 발언은, 많은 소송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는 제왕적 태도이자 헌법이 정하고 있는 삼권분립을 위배하는 것으로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대인 "알량한 GM 민원 들어주느라 정반대로 가나? 이게 창조경제냐?"선대인경제연구소의 선대인 소장도 10일 트위터에 "박 대통령, 통상임금 발언 정말 유감"이라며 알기 쉬운 장문의 글을 올리며 질타했다.
그는 "어려운 것 없다. 외국자본에 이득을 주느냐, 대다수 노동자인 가계에 혜택을 주느냐 문제"라며 "대다수 가계를 희생해 외국자본에 혜택주는 꼴인데, 그렇게 해서 투자 유치해본 들 무슨 의미인가?"라고 비판했다.
선 소장은 "투자 유치하기 위해 통상임금 문제 해결하겠다는 발상 따져보자"며 "투자 유치 왜 하나? 투자 유치해 일자리 늘리고 임금 올려주겠다는 건데, 투자 유치한다고 가뜩이나 사람값 낮은 나라에서 사람값 더 낮추면 무슨 의미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또 "통상임금 문제로 재계에서는 수십 조원 손실과 일자리 감소가 일어난다고 협박. 장시간 노동에 비해 저임금인 나라에서 무슨 되지도 안 한 협박인가?"라고 비난하며 "그런 식이면 선진국들은 다 망했겠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지금 한국이 장기 침체에 빠져드는 이유는 일자리와 소득이 부족해 내수가 위축되는 게 주원인"이라며 "이를 위해 실질 임금을 올려 가계 소득 여력을 키워주는 게 해법인데, 알량한 GM 민원 들어주느라 정반대로 가나? 제발 정신 좀 차려라"라고 일갈했다.
선 소장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면 좋지만 내용이 문제다. 좋은 인재와 기술력, 관련 사업서비스 및 인프라를 갖춰서 해외 자본이 오도록 해야지 임금 깎고, 세금 깎아서 유치하는 거야 개발도상국의 싸구려 장사 행태다"라며 "이게 창조경제냐?"라고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를 힐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