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한오백년,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정, 대전 블루스, 잊기로 했네, 인물현대사, 외로워 마세요, 오빠생각, 뜻밖의 이별, 세월, 만나게 해주, 미워 미워 미워, 고추잠자리, 일편단심 민들레야, 내 이름은 구름이여, 여와 남, 강원도 아리랑, 길잃은 철새, 황성옛터, 님이여, 오빠생각, 따오기 등등...
위 제목들은 조용필 님이 낸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 중 일부입니다. 80년대 초면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입니다. 그때로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네요. 우리 집은 산 속에 있었기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TV도 없었지요. 번화가에 나서면 레코드 가게가 많았습니다. 번화가에 나가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노래 중 제 심금을 울린 음성이 있었습니다. '조용필'이란 가수의 목소리였지요.
쥐어 짜는듯한 음색이 제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때라 그런지 한 사람의 노래가 가슴에 박히니 다른 가수들 노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쉰듯한 목소리가 좋습니다. 판소리 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좋습니다. 장사익 같은 소리꾼 음색 말입니다. 제게 들려온 조용필 노래 중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그랬습니다. '끼룩 끼룩' 기러기 소리가 들리고 파도소리 들리다가, 무거운 전자오르간 소리가 이어집니다. 전주가 나간후 쉰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메기만 슬피우네~♪"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노랠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 레코드 가게 들어가 물어보니 조용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레코드나 테이프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전기도 안 들어왔고, 전축은 커녕 작은 녹음기 하나 장만할 형편이 못 되었으니까요. 중학생인 제가 조용필 노래 듣겠다고 카세트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조를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저는 취직을 했습니다. 사환으로 일했는데, 월급이 10만 원도 채 안 되던 때였습니다. 저는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께 내의 한 벌씩 사드리고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카세트를 샀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건전지로 작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용필 님 노래 테이프를 사서 들었습니다. 제 처지와 제 감성에 잘 맞았기 때문일까요. 노래와 음색이 너무 좋았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불러도 불러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10여년 동안 그를 흉내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수가 되고싶어 서울로 가출도 했었습니다. 서울서 고생만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수의 꿈은 접었지만 음악 좋아 하는 건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거나 돈줄, 연줄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계도 산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배웠습니다. 가수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1988년 초 직장을 구했고 몇 년 간은 음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려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작사, 작곡법도 배우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초에 노조활동하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조용필 님 노래는 1990년 이전에 멈추었습니다. 1990년 이후부터 노조활동 하면서 이별, 만남, 사랑, 고독을 노래하는 대중음악과는 다른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로 살면서 그 반댓말이 자본가란 사실도 알게 되었고, 학습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떤 관계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이 자본주의 문화의 생산물임을 알게 되면서 차츰 거리를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노동가와 노동시 같은 노동문화에 심취해 갔습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기 언언 30년~♪"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란 노래였습니다.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마땅한 노동가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군가를 개사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소양강 처녀'나 '아리랑 목동'은 집회때 마다 부르는 인기가요 였습니다. 그 이후 '오월의 노래'와 '아침 이슬'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노동가를 작곡하는 분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노래가 작곡되고 테이프로 만들어져 배포되었습니다.
임을위한행진곡, 파업가, 솔아솔아푸르른솔아, 사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에서 백두까지, 거꾸로돌아가는 세상, 결사투쟁가, 골리앗의 그림자, 그렇구말구, 기름밥 동지, 나의사랑 전노협, 내사랑 민주노조, 노동악법 철폐가, 닐니리개파차, 다시또다시, 다시 일어서라 동지여, 다시 한 번 투사가되어, 동지의 발자욱, 뒷풀이가, 들어나봤나, 민중권력 쟁취가, 복수가, 사노라면, 불나비,철의 노동자, 투쟁의 한길로 등등...부산에서, 서울에서, 울산에서 집회 참석 할 때마다, 노동단체 행사 때마다 다른 종류의 노동가요, 민중가요 테이프가 나돌았습니다. 가격도 저렴해서 계속 사모으고 민중가요란 이름으로 나온 노래책도 사서 보면서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조용필 님 노래는 저에게서 멀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노동가요, 민중가요는 색달랐습니다. 정치나 현실을 풍자한 재밌는 노래도 있었고 노동자가 투쟁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동료가 아니라 동지란 단어를 부르며 어울렸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자꾸 듣고 함께 부르고 하다보니 노동자 집회나 모임이 좋아졌습니다.
원래 김소월 시가 좋았는데, 어느새 노동시인 박노해나 백무산이 쓴 노동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정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노동시도 있었습니다. 노동자가 살맛나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 임을 그때 느꼈습니다. 지금도 노동자로 살고 있고 노동의 노래가 더 와 닿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조용필 님과 관련한 추억이나 체험이 있으면 글을 올리라 했습니다. 제 현실이 노동자 임에도 아직 조용필 이라는 이름이 들리면 눈길이 갑니다. 아마도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 박혀 그런가 봅니다. 요즘 '바운스'라는 노래가 뜨고 있습니다. 그 분도 시대 흐름에 맞추는지 노래 가사에 영어가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조용필 이란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사연이 눈에 띄었습니다. 서른한곡의 노래가 초기에 계약을 맺은 어느 레코드 회사가 일부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음악만 좋아해서 다른 건 잘 모릅니다. 그 당시 저작권에 대해 잘 몰랐고 생소했습니다."기자회견을 하는 조용필 님 모습을 보면서 순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로지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떤분들이 조용필 님 노래 저작권 찾아 주자는 운동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레코드 회사는 "돈주고 산 것"이라며 "저작권 다시 찾아 가려면 돈주고 사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10여년전 변호사 자문을 통해 저작권 찾기 소송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대법원까지 간 저작권 찾기 소송은 실제 저작권자인 조용필 님이 패소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한때 참 좋아했던 가수 조용필. 그분이 이제 60이 넘었습니다. '그때 받은 돈 되돌려 주고 저작권을 다시 찾아오면 안될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찾고 싶지 않으면 모를까 주인이 저작권을 다시 돌려받고 싶어 하는데 오래전 계약이 그랬다고 영구히 그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것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한창 조용필 님에게 빠져 있을 때 그의 공연을 딱 한 차례 직접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인진 기억이 안 나지만, 앞 좌석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아직도 제 가슴 한켠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분입니다. 조용필 님은 분명 타고난 음악가이고 음악에 대한 열정 외에는 없는 순박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노동자로 살면서 노동가요를 더 좋아하는 저이지만 순수한 음악 열정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좋은 음악 많이 만들어 주시기를 마음으로나마 바라봅니다.
덧붙이는 글 | '헬로 조용필'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