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7시 58분. 김아무개(44, 강원도 속초시)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친한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바쁜 일 때문에 김씨는 곧장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다음날인 14일 또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가 자살했대…"라는 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고 젊은 시절 가수 철이와 미애의 열렬한 팬일 정도로 활발했던 친구였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김씨는 그제야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가슴이 아파왔다.
김씨의 말이다.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내가 메시지를 조금만 더 일찍 봤다면, 전화를 먼저 걸었다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났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선택을 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보냈는데, 그걸 보지 못한 것이 너무 한스러워요. 최근 1~2년 사이에 일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술 먹고 전화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렇게 될 때까지 그 녀석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용서하지 마라"지난 15일 오후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한 장례식장. 전통주 제조업체 배상면주가의 부평 대리점을 운영하던 이아무개(44)씨의 빈소가 차려진 곳이다. 그는 14일 오후 본사의 밀어내기 영업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대리점 재고창고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의 빈소에선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내 아들 살려내… 우리 아들 살려 주세요… 나도 데려가." 고인의 어머니는 연신 아들을 부르며 혼절을 거듭했고 깨어나서는 다시 아들을 찾았다. 불과 얼마 전 어버이날 국수를 끓여달라던 평범한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인 고인의 딸은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고 있다. 어린 딸이 받을 정신적 충격을 염려해 친척들이 사인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말할 힘조차 없는 듯 지쳐보였다. 가족들을 등지고 이씨가 스스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사에서 밀어내기 영업으로 떠안은 물량과 빚 때문이라고 유족들은 주장한다.
유족 서아무개(37)씨는 "고인이 대리점을 시작할 때부터 원하지 않는 물량을 떠안고 힘들어 했다"며 "빈병을 담은 빈 박스로 속이기까지 해봤지만 본사에서 물량을 계속 줬다고 하더라, 그걸 소화를 못하니까 감당이 안 될 만큼 대출을 늘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신아무개(51)씨는 이씨가 엄청난 빚으로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까봐 본인이 죽음을 선택해 빚을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며 애통해했다.
"언론에 보도된 고인이 배상면주가에 1억 3000만 원 정도의 부동산 채무를 진 것 외에 빚이 더 많아요. 가족들이랑 은행에 대출 받은 거 합치면 3~4억이 넘어요. 빚 독촉은 계속 세지고 살아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아요."이씨는 배상면주가 대리점을 올해로 10년째 운영해왔다. 그 전에는 영업사원부터 차근차근 성실히 일을 해왔다. 본사는 이씨의 성실함을 인정하며 대리점 운영을 추천했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는 이씨가 대리점을 열자마자 태도가 변했다.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어 팔 수 없는 전통주를 떠밀고 반품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이씨의 유족은 주장했다.
또한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월 국순당과 배상면주가 같은 전통주 업체 대리점의 지역거점제를 해지한 조치도 대리점 간 과도한 경쟁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유족 신씨는 "고인이 산사춘 물량을 받는데 바로 옆에 국순당이 들어섰대요, 이게 죽으라는 거지 뭡니까, 도대체 열심히 사는 서민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밀어내기 없다고 버티던 배상면주가, 사장의 때늦은 사과지난 14일 오후 이씨 빈소에 회사쪽 직원 6명이 방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회사쪽에선 언론을 통해 '밀어내기를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씨 죽음에 대한 사과나 장례식 비용 등에 대한 언급조차도 없었다. 이씨 유족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화환을 던져 버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남양유업에 이은 배상면주가 대리점주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고 '또 다른 을(乙)이 희생당했다'며 여론이 들끓자, 15일 오전에 배영호 배상면주가 대표가 직접 빈소를 찾았다. 그 때도 배 대표는 유감을 표했을 뿐 구체적인 장례절차와 보상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16일 오전 11시30분께 이씨의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전국유통상인연합회의 가맹점협의회 등 인사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이들은 이씨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공정위와 검찰 고발 등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경찰도 특별수사팀을 꾸려 조사에 들어갔다.
이날 기자회견이 끝나자 배영호 대표가 하루만에 다시 빈소를 찾았다. 배상면주가를 둘러싼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배 대표는 입을 꾹 다문 채 1층 건물 입구 앞에 이씨의 부인과 나란히 섰다. 이어 기자들을 향해 사과문을 읽어 내려갔다.
바로 전날과 사뭇 다른 태도였다. 회사쪽의 과거 밀어내기 영업을 인정하며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회사장을 통해 고인에 대한 예우를 갖추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유족들은 그동안의 설움이 복받치는 듯 눈물을 쏟아냈다.
16일 오후 회사쪽 인사를 비롯해 수많은 취재진이 장례식장을 떠났다. 2층 빈소에는 유족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기자가 유족에게 다시 다가가자, 더 이상 취재에 응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끝난 게 아니에요. 우리만이 아닙니다. 전국에 고통스러워하는 대리점주들이 아직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