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는 더 이상 우리에게 늦은 시각이 아니다. 깜깜한 방을 비추는 환한 불빛 앞에서 기계적으로 타자를 치고 있는 얼굴은 결코 환하지 않다. 이 모습은 그야말로 교육이라는 탈을 쓴 노동에 짓눌린 20대의 현실이다.
회상해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은 즐겁고 신나는 일로 충만했었다. 신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처럼 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루덴스의 삶이 현재의 20대에겐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놀이'라는 것은 20대 뿐만 아니라, 어느 연령대에도 필요한 그런 것이다. '놀이'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가벼운 마음과 순전한 즐거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대학을 나오고도 평균임금 88만 원을 받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현재의 20대에게 놀이란 결코 쉽지 않다. 진정한 놀이를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놀이를 하는 법을 잊은 것도 같다.
그 이유엔 사회적변화의 영향이 크다. 현재의 20대는 IMF가 일어난 후의 격변기 속에서 자란 세대이며 타격 입은 사회를 경험하도록 고스란히 내던져진 피해자다. 자본주의의 급진성이 탄생시킨 무한경쟁시대에 그들은 개별적 실체로서 자리 잡게 되었고,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만 했다. 냉정한 사회에 패자는 설 곳이 없다. <토이스토리>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로봇 버즈는 '지구를 지켜라'는 임무를 받고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놀지 못한다. 버즈와 지금의 20대는 과연 무엇이 다를까. 취업에 목적이 맞춰진 20대의 삶은 목적을 이루는 과정자체가 노동이다. 예정된 도착지가 없는 놀이와는 달리 모두가 한 방향만을 보고 질주하는 현재, 놀이가 주는 창조의 즐거움을 느낄 여력이 없다.
이러한 사회 속 20대에겐 사방이 적(敵)이다. 가정에서 지금 20대의 부모세대는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을 보냈던 유신세대이며, 대부분은 불안한 노년을 걱정하는 비정규직이 많다. 비정규직 부모와 비정규직 자식관계에서 20대들은 부모를 부양하기위한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바로 이 세대가 20대를 짓누르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또한 80년대 사회를 이끈 386세대는 학벌사회와 엘리트주의를 생산해 냈으며 더욱 경쟁을 강요하는 체재를 만들어냈다. 90년대 초반경제를 이끈 X세대는 20대와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계이다. 세대 간 경쟁도 모자라 같은 20대는 밟고 일어서야 할 거대한 적이다. 적이 많을수록 삶은 더 치열해진다. 사방이 적인 20대는 지원받을 곳이 없다. 즐거움은 더 큰 즐거움을 만든다는 놀이는 지금의 상황에선 뜬 구름 같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교육적 변화도 20대를 놀 수 없게 만든다. 이전의 대학은 무조건적이지 않았으며 꼭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했으며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학교(School)에서 그 어원을 따왔다고 하니, 교육과 놀이가 한 데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대학은 의무교육 아닌 의무교육이 되어버렸다. 대학은 선택인데도,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취업의 문을 열기란 힘들다. 고등교육 또한 대학입시를 위한 일련의 노동과정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아질수록 다양한 분야의 길이 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다시 경쟁을 해야 하고, 차별 또한 더 심해졌다. 형평성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인 교육이 불균형을 생산해 내는 주체로 변했다.
이렇게 차별을 만들어낸 대학은 떳떳하게 값비싼 등록금을 요구한다. 한국은 OECD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등록금이 비싸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은 거의 등록금을 내지 않는 미국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등록금이 가장 비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알바시장이 20대로 넘쳐나는 이유를 보여준다. 1인당 소득수준이 높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 많은 등록금을 부담하긴 힘들다. 알바도 모자라 학자금 대출까지 받으며 학업을 이어가는 20대 또한 많다. 공부를 하기 위해선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으로 얻은 돈은 다시 공부에 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수많은 학업량이 노동이 되었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고생해서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도 좌절하는 일이 다반사다. 영어는 이제 특별한 스펙이 되지 못하고, 해외유학쯤은 갔다 와야 이름 있는 기업에 이력서를 내밀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돈 없인 학업도 유지하지 못하는 지금의 20대에게 놀이는 시간낭비로 여겨질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억압을 20대가 내면화함으로써 놀이와는 점차 더 멀어졌다.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외국인들이 어학연수에서 본 한국학생의 특징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한국학생들에게 가장 많이들은 말은 "도서관 갔다 왔어요."라고 하니, 억압 또한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학생이 스스로 틀을 만들어 놓고 제한적으로 행동한다는 느낌이 들고, 때때로 너무 심각하고 쉽게 좌절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20대에게 있어서 도전은 특권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억압받은 20대는 도전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무서워하는 약자가 되었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스펙 쌓기와 연관될 뿐이다. 순수한 즐거움으로 법칙에서 벗어난 일탈을 꿈꾸는 놀이는 현재의 20대에겐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는 많은 경험과 도전을 하는 듯하지만, 사회의 요구에 따라 '할 수 밖에 없는'일을 하는 것이다.
요컨대, 20대에게 놀이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현재로선 가능하지 않다.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 무너뜨리고 다시 쌓으며 노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무너짐은 두렵지 않다. 모래성을 쌓아야만 한다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래성을 쌓는 그 자체가 놀이이며, 모래성들은 특정한 규칙 없이 우연히 만들어진다. 그래서 모양도 제각각이다. 이것은 어떠한 억압도 없이 자유롭게 놀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20대는 그 누구보다도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다. 사회는 균형을 논하면서 불균형을 만들어내고,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균형이 잡히길 바란다.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균형 잡기 위해, 어쩌면 균형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20대에게 놀이는 '무리한 일'이 되어버렸다.
덧붙이는 글 | 6문단에서 언급한 뉴스매체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3669 여기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2011년 12월 3일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