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언론 <뉴스타파>가 지난 22일 세계 각지의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이 245명이라고 밝히면서 국세청에 비판의 화살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세청이 할 일을 일개 언론이 한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국세청은 23일 미국과 영국, 호주 국세청으로부터 조세피난처 관련 자료를 넘겨받기로 했다고 뒤늦게 발표했다. <뉴스타파> 발표에 앞서 국세청은 자료 원본을 가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수차례 접촉해 명단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국세청은 왜 자체적으로 이같은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을까?
수출입은행 해외 직접투자 통계로 역외탈세 추려내현행법상 국내인의 해외 직접투자는 수출입은행에서 집계해서 자료화하도록 되어 있다. 외국환거래법시행령에 따르면 국내인은 외국법인의 경영에 참가하기 위해 취득한 지분이 전체의 10% 이상일 경우 외국환은행을 통해 수출입은행에 관련 내용을 보고해야 한다.
국세청은 이 자료를 중심으로 역외탈세 적발에 나서게 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해외 직접투자자들 중 탈세 혐의자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기초자료로 쓰이는 이 자료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11월 까지 불법 외환거래로 적발된 건수는 총 1051건. 그중 57.2%(602건)가 해외 직접투자와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 해외투자자가 신고의무를 지키지 않았거나 일부러 회피하는 경우다.
해외 직접투자 관련 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수출입은행이 집계하는 기초자료에도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 하반기부터 해외 직접투자에 대한 외국환은행의 사후관리 및 확인 의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고가 완벽하다고 해도 이 자료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외환은행업계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는 "수출입은행 자료는 투자규모 이외에는 말해 줄 수 없는 기초자료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탈세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현지 법인 거래 내역 등 다양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원석 "국세청은 눈 뜬 장님과 마찬가지" 박원석 진보정의당 의원은 22일 이와 관련해 "국세청은 눈 뜬 장님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국세청이 필요한 조사와 분석 이전에 탈세를 목적으로 하는 페이퍼 컴퍼니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박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 때 국세청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6월 현재 한국에서 쿡 아일랜드에 투자한 현지기업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뉴스타파>가 가지고 있는 명단에는 쿡 아일랜드에 법인을 설립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박 의원실에서 관련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석 보좌관은 "국세청이 국정감사 자료를 제출하면서 수출입은행 통계를 인용하길래 '국세청에서 별도로 관리하고 있는 자료는 없느냐'고 물었다"면서 "국세청 담당자는 '수출입은행 자료가 훨씬 오래됐고 관리가 잘 되어 정확하다'면서 수은 자료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 보좌관은 "국세청은 2010년부터 취합하고 있는 '자체 자료'에 대해서도 요구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 담당 부서 과장이 찾아와서 '줄 수 있는 데이터가 못 된다'고 털어놨다"고 덧붙였다. '자체 자료'란 국세청에서 기업에게 매년 세무신고와 함께 받는 투자명세, 재무상황, 영업소 설치현황 등을 말하는 것이다.
현행 법인세법에 따르면 해외직접 투자를 한 국내법인은 매년 해외 현지법인과 관련된 경영 자료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역외탈세를 적발하기 위한 이런 자료들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세청측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박 의원실과 통화도 여러차례 했다"고 인정 하면서도 "자료에 대해서는 고유번호도 부여하고 미제출 자료에 대해서는 과태료를 물리는 등 정상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과태료 부과 건수에 대해서는 "밝히기 어렵다"고 답했다.
"해외에서 돈 주고 받으면 잡기 어려워"... 국제 협력 필수업계에서는 국내에서 해외로 나가는 직접 투자에 대한 모니터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작심하고 하는 대규모 역외 탈세는 해외 계좌 사이를 오가는 경우가 많아 어차피 수출입은행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뉴스타파>에서 실명이 공개된 이수영 OCI 회장 부부에 대해 OCI 측은 계좌 개설 사실을 인정하면서 '누락된 신고와 납세가 있으면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OCI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회장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자회사인 OCI Enterprises의 이사회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받는 100만 달러 정도를 자산운용사를 통해 개인 계좌를 개설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환은행업계 관계자는 "OCI 케이스 같은 건은 국세청에서 잡기 어렵다"면서 "해외에서 돈을 주고받을 경우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라 밖에서 오가는 돈을 잡기 위해서는 해외 조세기관과의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23일 <KBS>에 따르면 국세청은 미국과 영국, 호주 국세청이 공동으로 확보한 조세피난처 정보 중 한국인 관련 부분을 넘겨받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르면 다음 달까지 한국인 탈세 정보를 확보해 하반기 중에 해외 탈세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한다는 계산이다.
국세청이 박원석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역외탈세로 적발된 건수는 총 537건, 세금추징액은 2조 6218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중 조세범칙 혐의로 고발 및 통고처분 된 건은 45건, 전체의 8%에 불과했다. <뉴스타파> 발표로 체면을 구긴 국세청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