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텐마 기찌 겐나이 이세쯔 한따이!"
(후텐마 기지 현내 이전 설치를 반대한다!)지난 5월 19일 오키나와 현 기노완시 해변공원내 옥외극장에 울려 퍼진 함성소리다. 오키나와 평화운동센터가 '복귀 41년 5·15평화와 생활을 지키는 현민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날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축제가 아닌 투쟁의 하루가 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오사카 시장)가 13일 '주일미군 풍속업소 허용' 발언이 오키나와 지역지 <류큐신보>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되는 등 극우인사들의 망언이 최근 잇따르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높아지고 있다.
이날 오키나와에는 폭우가 하루 종일 쏟아졌다. 그럼에도 현지 주민과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참가자 3500여 명은 오전 시가지 행진에 이어, 오후 현민대회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행사장에는 제주와 평택, 군산 등 한국 내 미군기지가 있거나 기지 건설 문제로 투쟁 중인 지역 활동가와 진보연대 등이 참가해 '미군기지 신설반대' 등을 함께 외쳤다.
송강호 한국 참가단장은 기념식 단상에 올라 "오키나와를 미군기지가 없는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이 대회에는 옛 일본군에 위안부로 강제동원 됐던 김복동 할머니도 내빈으로 참석해 "전쟁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다시는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여러분이 힘을 모아서 아베, 하시모토 같은 정치인들을 몰아내 달라"고 당부했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이날 대회장에는 일본기가 게양되지 않았다. 기미가요도, 천황만세를 연호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반대로 '천황반대'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일본 열도 최남단 오키나와는 본토와 다르다. 달라도 무척 다르다. 왜일까.
한국 참가단이 오키나와에 도착해 먼저 들은 것은 '오키나와는 류큐지 일본이 아니다', '일본(사람)이라 부르지 말라'는 요구다(요청이 아니다). 이 말에는 오키나와와 일본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역사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2013년 평화기행 한국참가단과 함께 오키나와와 일본, 오키나와와 미군기지. 그 고통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국참가단은 해군기지 설치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외치며 935일간 주민들이 촛불을 치켜들었던 평택 대추리, 미 공군기지가 있는 군산,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 활동가 등 7명으로 구성됐다. 참가단은 13일부터 20일까지 오키나와 전역을 다니며 전쟁의 상흔을 살피고 미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는 주민과 연대활동을 벌였다. 또 동아시아 미군기지 국제 심포지엄, 5·15평화행진 및 현민대회 참석 등 평화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1945년 4월 1일 '철의 태풍'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열도에 패전이 시시각각 임박해 오고 있었다. 미군은 지난 몇 달 동안 작은 섬들을 점령하며 숨통을 죄어오다, 10만 발 함포 사격의 지원 속에, 4월1일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던 오키나와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막강한 화력의 지원과 54만8000명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섬의 중앙부에 상륙해 남북으로 진격해 갔다.
이에 대항하는 일본군은 현지에서 차출한 학도병을 포함해 10만2000명에 불과해 미군 총 전력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후 3개월 간 오키나와에는 2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한 전쟁의 화마가 휩쓸게 된다. 이중 대부분은 일본 측 전사자로 18만8136명에 이르며, 미군은 1만2520명이 사망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전투를 '철의 태풍'이라고 불렀다. 주목할 것은 일본 전사자 중 오키나와 출신 군인 2만8228명과 일반 주민 9만4000명 등 12만 명이 넘는 현지인이 숨졌다는 사실이다(마부니 언덕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에는 주민 희생자 수를 14만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군의 폭격과 전투로 사망한 숫자가 상당한 것이지만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경우도 많았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토미야마 마사히로(58)씨는 "일본군이 막판에 몰리자 군사기밀을 우려한 상부의 지시를 받아 본토(야마토 大和)말이 아닌 오키나와어로 말하는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다. 또 피난 장소로 들어온 군인들이 미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내쫓거나 죽이는 만행도 저질렀다"고 분개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본토인에 대한 감정이 큰 이유 중 하나다.
요미탄 마을 동굴서 주민 85명 사망 '집단 강제사'그런데 이곳에서 주민 140여 명 중 85명이 숨지는 '치비치리가마'(가마는 일본말로 동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첫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요미탄손(村, 면 보다 작은 마을 규모)이다. 일본군은 전원 북쪽으로 후퇴하고 아무도 없었다.
주민 지바나 쇼이치(知和昌一)씨는 "당시 미군에 맞서다 죽은 사람은 청년 2명 뿐이다. 나머지는 미군이 죽인 것이 아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미군에게 붙잡히면 남자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여성들은 강간당할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우에치 하루'라는 18세 소녀가 강간당해 욕보이기 싫다고 집에서 가져온 칼을 엄마에게 주면서 죽여 달라고 해 엄마가 그렇게 했다. 이후 사람들은 공황상태가 돼 동굴에 있던 주방용 칼이나 농기구 등으로 서로 죽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85명의 생명이 죽어갔다"라고 참상을 전했다.
그는 "군대는 주민들을 지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잘못된 교육이 주민들을 죽인 것이다. 일본정부는 교과서에서 가마의 죽음이 집단 자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군국주의 교육에 의한 '집단 강제사'다"라고 강조했다.
집단자결을 강제한 사례는 적지 않다. 오키모토 히로시(66)씨는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제했다"며 "일본군인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수류탄을 나눠주고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수류탄이 모자르자 주사를 놔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군관민 공생공사'를 외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부모, 형제를 서로 죽이도록 강요한 것이다. 오키나와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은 이유다.
주일미군 75% 주둔, 오키나와는 거대한 병영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주일미군기지의 75%가 집중돼 있는 곳이다. 지금도 오키나와의 20%라는 광대한 면적을 점거하고 있어, 주 도로인 5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 양쪽으로 기지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가지 중심부는 물론, 해안가 대부분을 차지해 주민들 생활 피해가 60년째 이어지고 있다.
미군범죄와 소음, 환경문제 등도 심각하다. 주민들은 일본 정부가 본토 주민인 야마토(大和)를 위해 오키나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1955년 9월 미군이 6세 어린이를 살해한 사건 이후 각종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1995년 9월 4일에는 미 해병대원 3명에 의해 12살 여중생이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오키나와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분노한 8만5000명의 주민들은 10월 21일 집회를 열고 기지 철거와 '주일미군 지위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등 분노가 극에 달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일 정부는 SACO(오키나와에 관한 미·일 특별행동위원회)를 만들어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현 내 헤노코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그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쳐 난항을 겪고 있다. 한국 평화참가단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13일에도 술취한 미군이 주택을 침입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04년 8월13일에는 기노완시 오키나와국제대학에 후텐마 기지 소속 미군대형 헬리콥터(CH53E 슈퍼스탤리언) 한 대가 추락했다. 곧바로 미군이 현장을 봉쇄했고 기노완 시장도 대학 학장도 접근할 수 없었다. 경찰도 조사를 충분히 할 수 없었다. 한국처럼 일본에서도 미군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텐마 기지는 480만 평의 큰 규모로 인구 9만2000명의 소도시인 기노완시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규모도 문제지만, 주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범죄와 소음 등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이다.
전쟁 때 피난을 갔던 주민들이 종전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후텐마 기지 활주로가 들어서 있었다. 할 수 없이 주민들은 기지를 끼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도시를 형성하였고, 지금껏 미 해병대의 범죄와 헬기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후텐마 기지에는 잦은 사고로 '과부 제조기' '미망인' 등으로 불리는 'MV-22 오스프레이(Osprey)'기가 배치돼 있어 주민들은 늘 불안을 안고 살고 있다.
후텐마 기지 북쪽에 위치한 가데나 기지는 아시아 최대 규모로 도쿄돔 420개가 들어가는 크기다. 베트남전쟁에 투입될 B52가 1968년 2월5일부터 이 기지에 상주하면서 주민들은 '핵탑재 B52의 철거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지 인근 차량 휴게소인 '길의 역' 3층 전망대에서는 기지 안을 살펴보려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해안·산골까지 미군기지 주둔... 주민 3000일 넘게 저지 투쟁
이밖에도 후텐마 기지 이전 예정지인 헤노코에서는 주민들이 바다를 매립해 활주로를 만들려는 군 당국의 시도에 맞서 3300일이 넘게 천막농성을 하며 저지투쟁을 벌이고 있다.
천막 농성장 안팎에는 '헤노코 바다를 지키자', '미군기지는 가라', '헌법9조를 지키자', '기지반대' 등이 적힌 펼침막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또 오키나와현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히가시손에 있는 다카에 마을 주민들도 만났다. 이 마을은 국제적 생태 보고인 얀바루숲 한 자락에서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왔다. 마을은 얀바루숲 동쪽 끝에 있다. 숲과 함께 살아온 인구 150명 남짓한 이 마을이 최근 6년 동안 조용할 날이 없다. 미 해병대 헬기 훈련장 건설 때문이다. 지금 주민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마을 입구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6년 일본 정부와 미군 당국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의 재편을 담은 '미·일 특별행동위원회'(SACO) 합의의 일환으로 다카에 마을 주변에 헬기 훈련장 6곳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훈련장은 다카에 마을을 에워싼 형국으로 들어설 계획이었다. 주민들은 인근 기지를 통합해 기지를 확장하려는 계획에 맞서 6년째 주민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농성장에서 만난 모모에다씨는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구치게라'(딱다구리의 일종)의 산란기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사람이 새를 지켜야 하는데, 새가 사람을 지키는 상황"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듯 한국 참가단이 살펴본 오키나와는 현 중심지부터 해안·산골까지 곳곳에 미군기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미군기지가 있는 곳마다 주민들의 생활불편이 따르고 저항이 있는 것도 보았다.
한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 산재한 미군기지가 2016년까지 집결하는 것으로 예정된 평택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내내 놀랍고 착잡했다. 아름다운 제주도가 오키나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강정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이번 평화기행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오키나와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던 1985년 요미탄손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오키나와는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제창, 천황 방문 반대 분위기가 강했다. 그런데도 요미탄손에서 열린 소프트볼 대회장에 일장기가 휘날리자 지바나 쇼이치 씨가 이를 끌어내려 불태워 버렸다. 국가 공식행사에서 국기를 훼손하는 중대 사건이었으나 일본 정부가 이례적으로 약한 처벌인 벌금형에 그칠 정도로 오키나와의 반일 정서는 대단했다.
쇼이치 씨는 자신의 토지가 코끼리우리라고 불리는 미군 통신기지 내에 200평방미터 가량 있는데, 450명의 토지주 중 유일하게 토지 임대 재계약를 하지 않고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기지로 들어가 390일 동안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또 농성 당시 토지를 일본 정부가 2억 엔이라는 큰 금액에 구매 하겠다고 나섰으나 자신의 운동을 돈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해 화제가 됐다. 3선의 요미탄 기초의원이기도 하다. 가마 발굴에 적극 참여했다. 현재는 스님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평택평화센터 소속으로 2013년 평화기행 한국참가단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