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서 강릉까지의 버스 요금은 6300원. 한 시간 여를 달린 버스가 강릉에 도착했다. 도시는 조용했다. 동해로 가는 기차를 타기에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강릉 임영관 삼문(객사문)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택시 기사에게 객사문으로 가자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임영관'이라고 재차 말하자 그제야 아는 체를 한다.
무릇 건물이란 사람의 온기가 배어야...강릉 임영관은 사적 제388호다. 아문은 그 옛날 관아의 정문답게 위풍당당했다. 중문을 지나면 바로 동헌과 별당이 있다. 동헌은 말 그대로 무슨 세트장 같았다. 문화재가 복원되면 대개 얼마 못 가서 죽은 공간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습성이 있는데 이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옛 건물이고 보존의 가치가 있는 건물일수록 사람의 온기가 깊이 배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것쯤은 이제 어린아이도 알 법한데 말이다.
그때 옆 건물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헌과 이어진 별당 건물인데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바닥에는 가만히 책을 볼 수 있도록 앉은뱅이책상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 이거야' 바로 무릎을 쳤다. 유적지라 해서 공간을 단순히 비워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드나들고 시민들이 이용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건물을 살려야 한다. 그럼으로 인해 사람들도 자연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건물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별당 왼쪽 언덕 위로는 의운루가 높직하게 걸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의운루는 임영관 남쪽에 있었고 예부터 강릉의 절경으로 꼽혔다고 한다. 왼편으로는 칠사당이 보인다.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우선 뒷문을 통해 삼문으로 향했다.
아, 근데 뒷문을 빠져나오니 바로 도로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마침 길가에는 우체국 택배 차가 있다. 택배 차와 고려시대 건물의 부조화, 딱히 떠오르는 말은 없었으나 괴리감 같은 걸 느꼈다. 당혹스러웠다. 예전에야 동헌과 연달아 있는 한 공간이었을 테지만 일제강점기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고 임영관 일대가 철거되면서 생긴 기묘한 운명이었다. 동헌과 객사 사이에 도로가 생겼고 복원과정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결하고 소박함의 극치, 임영관 삼문찻길을 건너자 경사진 곳에 네댓 벌의 단 위로 국보 제51호 임영관 삼문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객관'이라고도 한 객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 건물이다. 임영관 삼문은 객사의 정문이다. 강릉부 객사인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과 중수를 거듭했다.
흔히 '객사문'으로 불리는 임영관 삼문은 주심포 건축의 정수로 빼어난 비례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간결하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세련된 조각 솜씨에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기둥의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도 눈길을 끌었다.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이다. 강원도 내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객사 및 관아 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어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만 남았다가 2006년 임영관 복원에 이어 2012년 관아의 아문, 동헌, 별당, 의운루 등이 복원됐다.
그 흔한 단청도 없이 담백한 건물은 경지에 이른 도인의 풍모다. 애써 꾸미지 않고 부러 멋 내지 않으며 내세우지 않아도 절로 감동을 받게 되는 지경이다. 모든 것이 겉치레일 뿐 내면의 깊숙한 경지가 극히 단조로운 외양으로 드러난 것이 이곳 삼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배흘림기둥을 보라. 자연 그대로의 덤벙주초에 올린 늙어 비뚤어진 기둥의 옹이는 또한 어떠한가. 간결하고 소박함의 극치인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의 멋들어진 조합은 또한 어떠한가. 배흘림기둥 또한 현존하는 목조문화재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니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 웅혼함에 놀라게 된다. 특히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개를 젖혀 올려보느라 목덜미가 아픈 것쯤은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을 일이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이어서가 아니라 왜 이 삼문이 국보인 지는 이곳에 서 보면 자연 알게 된다.
공민왕의 친필이라는 전대청의 임영관 현판앞과 뒤에는 배흘림 원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열에는 사각기둥을 세워서 문을 달았다. 문을 지나면 객사 영역이다. 넓은 마당 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건물은 중대청이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객사는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묵었던 장소로 조선시대에는 객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곳이 전대청이다. 공민왕의 친필로 전하는 임영관 현판은 과거 임영관을 철거할 떄 임영관 삼문에 걸었던 것을 2006년 10월 임영관 복원 준공 후 본래의 위치인 전대청에 옮겨 걸었다. 전대청은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공간이다.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했던 곳이다. 또한 사신 및 외관이 왕에게 글을 올리거나 왕이 내리는 향을 맞이하는 의식, 관찰사 순행 시 지방관이 연명을 행하던 곳으로 좌우에 있는 동대청과 서헌에 비해 지붕이 한 단 높게 지어졌다.
전대청 좌우로는 온돌방과 마루가 있는 동대청과 서헌이 있다. 동대청은 서헌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의 숙식 및 연회, 재판, 국가 경사 및 애사 시 망곡 등을 하던 곳이다. 서헌보다 규모가 크다. 사신 일행 중 2품 이상은 동대청을, 정3품 관료들은 서헌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동대청이 서헌보다 위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예스러운 정취, 칠사당다시 삼문을 거쳐 동헌으로 돌아와서 한쪽에 있는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을 찾았다. 최근에 복원된 다른 건물과는 달리 칠사당은 예스러운 정취가 남아 있다. 건물 자체에서 풍기는 오래된 향취도 그렇거니와 건물을 둘러싼 산세와 몇몇 고목들이 칠사당 일대를 제법 운치 있게 만든다.
칠사당은 부사가 업무를 살폈던 곳으로 7가지 정사를 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옛 고가 사랑채처럼 ㄱ자 구조에 누마루를 가진 형태이나 그 부재의 쓰임이 매우 크고 굵직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있었고 강릉군수의 관사로 쓰이다 1958년까지 강릉시장 관사로 사용됐다고 한다.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해마다 음력 4월 5일이면 칠사당에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6월 9일~16일)의 신주 빚기, 강릉관노가면극과 단오굿, 강릉농악공연 등 각종 행사와 전시, 체험 등이 열린다고 한다. 새로 복원된 관아건물에서 강릉의 문화를 즐길 일이다. 강릉역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