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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내 손자! 할아버지는 한결이를 보면 얼굴이 활짝 펴집니다. 아들 아이가 어렸을 적에 찍은 것입니다.
그래~ 내 손자! 할아버지는 한결이를 보면 얼굴이 활짝 펴집니다. 아들 아이가 어렸을 적에 찍은 것입니다. ⓒ 최요한

8살짜리 아들 한결이는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가장 좋다. 할아버지는 뭐든지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할아버지 옛날에 뭐했어?"

음…. 출판사를 하셨다고 이야기 할까? 그건 너무 어렵겠지? 그럼 민주화 투쟁을 하셨다고 할까? 그건 더 어렵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아빠는 결국 이렇게 답했다.

"응! 할아버지는 옛날에 슈퍼맨이었어!"
"정말?"
"응! 정말~."

며칠 뒤, 할아버지께서 난감한 음성으로 전화하셨다.

"애비야~ 한결이가 이 할애비에게 옛날에 슈퍼맨이었냐고 묻는데, 이게 뭔 일이냐?"
"아버지, 아버지께서 박정희, 전두환 하고 싸우실 때,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셨잖아요? 그래서 한결이한테 이해하기 쉬우라고 슈퍼맨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어요."
"허허허…. 그래! 한결아~ 이 할애비는 옛날에 슈퍼맨이었어요. 악당들을 무찌르는 슈퍼맨…."

전화도 끊지 않고 한결이하고 이야길 나누신다. 조용히 전화를 끊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버지…. 정말 슈퍼맨 보다 더 강하셨잖아요.'

촛불시위 이후 이명박의 보복통치가 자행되던 2009년 어느 날(나는 그때 시사개그맨 노정렬과 <개구쟁이>라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마음껏 이명박을 조롱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하셔서 당황했다.

"이명박이 잡아가면 '묵비! 단식! 자해!'… 명심해라. 이러면 이길 수 있다!"

그러시면서 또 다시 그 예전의 레퍼토리를 말씀 하신다. 1986년, 남한산성 보안사, 고문, 빨갱이, 그리고 묵비와 단식, 자해…. 할아버지 슈퍼맨의 무기는 묵비, 단식, 자해였다.

독재, 학살, 고문 그리고 민주화운동

이승만은 독재자였다. 뒤를 이은 박정희는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독재자였고, 전두환은 광주를 학살하고 나선 진짜 독재자였다. 광주의 죽음에 분노하신 아버지는 목숨을 내놓고 투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있는 집안들은 으레 그렇듯이, 가.난.했.다. 나는 지금도 수제비를 먹지 않는다.

정치를 잘 모르시는 어머니는 아버지께 가끔 혼이 나셨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타박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1980년이었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서 KBS의 9시 뉴스를 보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아나운서가 굉장히 무서운 말을 했다.

"지금 광주지역에서는 극심한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여성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느니,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였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습니다. 국민여러분께서는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침 그때 아버지께서 밖에서 들어오셔서 방금 그 예쁜 아나운서 누나가 '유언비어'라고 한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무서웠다. 어머니는 그거 유언비어라고 한 마디 하셨다가 또 혼나셨다. 아버지는 답답해했고, 절망했다. 아마 지금 '일베충'이라는 것들이 저지르는 일을 아시면 또 낙담하실 게다.

아버지께서 언제부터인가 '김대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께서 몰래 가져온 카세트테이프(그때는 CD가 없었다)를 이불을 뒤집어쓰고 같이 들은 적이 있었다. 제목은 '민주회복' 어쩌구 하는 것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야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때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미국에 있는 동포들을 모아 강연회를 열었다. 당시 재야인사들은 그것을 녹음한 테이프, 몇 번을 복사했는지도 모를, 음질도 조악한 그 테이프를 국내에 몰래 들여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아버지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던 것이다. 이불 속에서 들리는 김대중의 목소리는 유머가 있었고 말을 참 잘했다. 재미있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디서 이런 거, 들었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가끔은 대학생 형들이, 그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아버지를 따라 우리 집에 와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곤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수배학생들을 아버지께서 집에 데려와 재우신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민주헌정연구회 전국운영위원장(김영삼에게는 민주산악회가 있었고 김대중에게는 민주헌정연구회라는 사조직이 있었다)을 맡으시며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자 더 이상 대학생 형들을 데리고 오지는 못하셨다.

기관원이라 불리는 덩치 큰 아저씨들(경찰, 안기부, 보안사 등)이 내가 친구들과 동네에서 땅따먹기니 다방구니 하면서 놀고 있으면 쓱 나타나서 아버지 안 계시냐? 하고 묻고 가곤 했다. 아버지께서 집에 며칠 들어오지 못하셨고 나는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수배 중이셨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에게 사단이 났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사라지신 것이다. 어머니는 걱정을 하셨고 아버지 친구 분들도 백방으로 이 경찰서 저 경찰서를 찾으러 다니셨다고 한다. 김대중 선생이 국회의원들을 시켜서 이곳저곳을 수소문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연락이 왔다.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다. 아버지는 충무로 백병원 맨 꼭대기에 거의 송장처럼 누워 계셨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신 아버지께서 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돌아가신 거 아닌가? 나중에 들으니 광화문 한복판에서 백주 대낮에 검은 지프 차량에 납치를 당하셨다는 거다.

아버지께서는 나중에 말誌에 '저승사자와의 대결'이라는 글을 자세하게 쓰시기도 했지만, 납치한 놈(?)들은 군인들이었고 잡아간 곳은 보안사였으며, 잡혀간 장소는 남한산성이라는 곳이었다. 거기 가면 죽어서 나오든 거의 송장이 되어 나오든 한다는 곳이란다. 그때는 군인들이 백주대낮에 납치해가고 고문하고 죽이고…. 그런 일이 흔했다. 바로 거기서 슈퍼맨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전라도 새끼도 아닌 놈이 왜 김대중에게 충성해?"
"바른대로 대라! 너 빨갱이지~"

온갖 모욕과 몽둥이찜질이 가해졌고 여러 번 까무러쳤다고 한다. 버티다, 버티다 못해 이제는 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묵비를 하고 단식을 하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급기야 나중에는 책상 모서리든 벽이든 머리를 부딪치며 '자해'를 하셨단다. 보안사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독종'을 데려온 것이고(나중에 들으니 아버지 별명이 '거머리'였단다) 혹여나 (민헌연 전국운영위원장이기 때문에) 죽기라도 하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문하던 군인들에게 "아예 죽여 달라! 나 이 세상에 이젠 정나미 떨어졌다. 죽어서 하나님 품에 편히 안기고 싶다"라면서 대들었다고 한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꼭 지금의 내 나이와 같은 40대 중반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아들 최요한이 가장 보고 싶으셨다고 한다. 결국 죽지 않고(?) 풀려나셨지만 지금도 아버지는 그때 몽둥이로 맞은 왼쪽 어깨가 불편하시다.

평생 민주주의 위해 싸우셨는데, 폐암 4기라니...

김대중 대통령 시기, 공직을 한 번 맡으시고 이후 아버지께서는 조용히 정계를 은퇴하셨다. 초대 평민당 총무국장에다 국회의원을 두 번씩이나 양보를 했고 나름 고위직에도 오르셨지만 검은 돈 한 번 만지신 적이 없다.

김대중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누군가 우리 집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금을, 그것도 현금으로 들어온 것을 그대로 돌려 보내셨다. 이후 공직을 맡으실 때도 그렇고. 하여튼 '깨끗한 정치인 상 주기' 같은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받으셨을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도 가난하시다. 그냥 서민으로 손자 손녀 보는 낙에 사신다.

아버지의 후배들이, 또 한참 아래 있던 아우들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면서 정계를 주름 잡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냥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염려하시면서 사셨다. 심지어 남들도 흔히 받는 '민주화 운동 유공자' 신청도 거부하셨다. 기독교 장로님으로서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으시고, 워낙 건강 체질이시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께서 솔직히 백년 장수 하시는 것으로 믿었다. 고문 받을 때 다치신 왼쪽 어깨 빼 놓고는 별 이상이 없으신, 그야말로 장수 체질이시기 때문이다.

2년마다 있는 건강검진도 꼬박꼬박 받으셨다. 2013년 1월 28일에도 건강검진을 받으신 후 건강에 자신 있어 하셨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3월 27일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급히 보라매 병원 응급실로 옮기셨다. 위험한 순간을 넘기셨지만 이틀 뒤 암 병동으로 옮기셨고 여기서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것이다. 일반 건강검진에서 별 이상 없다고 하신 후 두 달 만에 폐암 말기라니….

병원들의 일반건강검진은 돈벌이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돈으로 보는. 병원에서는 이상이 있으니까 다시 정밀하게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전화도 그 어떤 행동도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또 분노하셨다. 당신께서 목숨을 다해서, 생계를 내팽개치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에 나선 것은 이런 사회를 만들고자 함이 아니었다고 말씀 하신다. 당신께서는 이미 86년에 보안사에서 죽은 목숨이기에 덤으로 사는 인생, 억울할 것은 없으나 세상이 이렇게 돈으로 망가진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신다.

정직하게 일한 사람이 대우 받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꿈을 꾸셨는데, 눈 먼 자들이 눈을 뜨고, 묶인 자들이 해방을 맞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셨는데, 우리의 현실은 정 반대로 가고 있다고 한탄하신다.

당신께서는 오늘, 홍준표 도지사가 진주의료원을 폐업했다는 기사를 읽으셨다. 당신께서 평생을 걸고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는 것은 이런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세상을 꿈 꾸셨던, 묵비와 단식과 자해가 유일한 무기였던 슈퍼맨 할아버지의 삶, 그 무궁무진한 무용담(武勇談)도 이제 6개월 남았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아버지, 응모글

- 뱀발 : 아무래도 병원과 법적 소송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도움을 주실 변호사님의 조언을 구합니다.



#최요한#슈퍼맨 할아버지#묵비, 단식, 자해#폐암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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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1969년 서울 산(産), 2000년부터 방송에 관심 있어 주변을 맴돌다 2005년 우연히 얻어 걸린 라디오 전화인터뷰부터 시사평론 방송시작, 2014년부터는 경제 Agenda에 집중, 시사경제평론을 하면서 몇몇 경제채널 출연하고 있음, 어떻게 하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종일 고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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