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실종 여대생을 살해한 혐의로 지난 1일 새벽 대구시 중구 삼덕동의 한 클럽에서 체포된 조아무개(24)씨가 4일 오전 자신의 집과 시신을 버린 경북 경주시의 한 저수지에서 차분히 현장검증에 임했다.
조씨는 숨진 남아무개(22)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과 현관문 앞에서 넘어진 남씨를 성폭행하려는 장면,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발로 차 숨지게 한 뒤 이불에 싸서 렌터카 트렁크에 옮겨 싣는 장면을 태연하게 재연했다.
이날 현장검증에는 200여 명의 주민과 젊은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지켜보았다. 일부의 주민들은 조씨의 원룸 앞문과 뒷문쪽에서 재연 장면을 지켜보며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조씨를 향해 욕을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동은 없었다.
조씨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저수지에서 범행동기 등을 묻는 취재진에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다"고 짧게 말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경찰은 지난 3일 대구지법에서 영장이 발부돼 경찰에 구속된 조씨에 대해 이날 현장검증을 바탕으로 보강조사를 실시한 뒤 조만간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여대생 실종 살해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사건 발생 일주일만에 범인을 붙잡았지만, 택시기사를 살해용의자로 오인하고 수사력을 집중하다 보니 초동수사에 허점을 드러내는 등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택시기사 용의자로 오인, 사진 한 장 들고 범인 찾아나서 "운 좋았다"
경찰은 지난달 25일 새벽 택시를 집으로 귀가하던 여대생이 실종된 뒤 이날 오후 7시 여대생의 어머니로부터 실종신고를 받고 수사에 나섰다. 이후 26일 오전 낚시꾼에 의해 경주의 한 저수지에서 시신이 발견되자 대구중부경찰서에 수사팀을 꾸려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남씨와 함께 술을 마셨던 여성들로부터 클럽에서 20대 남성 2명과 어울렸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택시기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택시를 찾는 데 매진했다. 20~30대가 운전하는 법인택시 300여 대 등에 대해 수사를 집중하는 한편 대구와 경주를 오가는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로의 CCTV를 확보해 대구 번호판을 단 택시 70여 대를 확인했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결국 지난달 31일 오후 8시 10분경 남씨를 태웠던 택시기사 이아무개(31)씨를 긴급 체포했다. 경찰관 30여 명이 들이닥쳐 이씨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이웃 주민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날 경찰은 "이씨가 정말 범인이 맞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피해자를 태운 CCTV만을 보고 택시기사를 체포했겠느냐"며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를 체포한 지 불과 6시간만에 진범이 뒤바뀌었다.
택시기사 이씨가 경찰 조사에서 "남씨를 태우고 가다가 신호대기 중에 한 남성이 올라타 남씨의 애인이라며 북구 산격동으로 가 달라고 했다"고 진술하면서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경찰은 택시기사 이씨의 증언을 토대로 산격동에서 범인 조씨가 모텔을 전전하는 모습이 CCTV에 찍힌 모습을 보고 남씨가 클럽에서 함께 어울렸던 2명의 남성 중 한 명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던 택시기사 이아무개씨는 꼬박 6시간 동안 수갑에 채워져 경찰서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경찰은 클럽에서 범인 조씨가 남씨와 어울린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신상파악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때서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사진 한 장만 들고 시내의 클럽으로 무작정 뛰어나갔다.
경찰은 1일 오전 3시 30분쯤 중구 삼덕동의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조씨를 붙잡았다. 조씨가 붙잡힌 클럽은 숨진 남씨가 지난달 25일 실종되기 전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클럽이었다. 만약 조씨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도주했더라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조씨를 붙잡은 후 "운이 좋았다"며 스스로 안도하기까지 했다.
대구의 한 지하철역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 "폭행 전과자인 줄 알아"
경찰은 조씨를 붙잡고도 우왕좌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경찰은 당초 조씨가 무직이라고 밝혔지만, 대구지하철 1호선의 한 역에서 지난해 8월부터 공익요원으로 근무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조씨는 2012년 7월 30일 소집돼 한 달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뒤 같은해 8월 30일 지하철역으로 배치돼 역사 내 선로 안전요원으로 근무해 왔다.
현행 병역법 시행령에 따르면 6월 이상 1년 미만의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1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 상태에 있을 경우 공익근무요원 소집 대상으로 분류돼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도록 하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병무청에서 넘어올 때 성범죄 전과자인줄은 몰랐다"며 "내부에서 면담하는 과정에서 폭행 전과라고 진술해 그렇게 알고 기록도 폭행 전과자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씨는 자신과 함께 교육을 받은 공익요원들에게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까지 공익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후에는 동대구역 근처 사설 유료주차장에서 주차관리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조씨는 지난달 25일 여대생 남씨를 살해한 후 사체를 저수지에 버린 이후에도 28일과 30일 평소처럼 출근해 정상 근무를 한 뒤 오후 4시에 퇴근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해왔다.
저수지에서 시신이 발견된 다음날인 27일과 29일, 31일은 두통과 요통을 호소하며 병가를 냈지만 지하철역 근무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성범죄 알림e'에도 정보 공개돼 있어
조씨는 또 지난 2011년 1월 울산시 중구에서 미성년자를 성추행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 80시간, 신상정보공개 및 고지명령 3년을 선고 받았다.
이런 사실은 인터넷 '성범죄자 알림e'에도 정보가 공개돼 있었다. 이곳에 공개된 성범죄 전과자 중 산격동에 주소를 두고 있는 전과자는 조씨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경찰은 남씨가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된 지난달 26일 오후 남씨의 휴대폰이 산격동에서 켜졌다 꺼진 사실을 확인했지만 택시기사만을 강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만일 경찰이 남씨의 휴대전화 위치가 확인됐던 산격동 일대의 성범죄자 정보를 확인했다면 더 빠른 시간안에 검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대생 실종 사망사건을 수사중인 대구중부경찰서와 조씨의 거주지 관할인 대구북부경찰서간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아 수사력을 낭비했다는 비난이다.
결국 경찰이 '헛다리' 수사를 하는 동안 제2, 제3의 피해자를 낳을 뻔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조씨가 낮에는 공익요원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술집을 찾는 등 태연한 생활을 하고 남씨를 만났던 클럽에 다시 나타나 새로운 여성에 대해 범행을 모색하는 사이 경찰은 일주일 내내 택시기사만을 찾았다.
이에 대해 김영숙 대구여성회 대표는 "여성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 사회안전망은 법과 공권력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며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정부와 공권력의 사후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는 반응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