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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통하지 않는 영'을 내린 셈이 됐다. 국립국어원이 북한 인명 표기에 대해 두음법칙을 적용할 것을 주지시켰지만, 북한 인명 표기를 자주 쓰는 통일부에서도 통하지 않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 달 30일 보도자료를 내고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 리설주는 '이설주'로,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는 '최용해'로 써야 한다면서 과거 결정을 상기시켰다.

1992년 문화부 국어심의회는 인명·지명 등 북한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에도 한글 맞춤법을 준수, 맞춤법 상 어두에 'ㄹ'을 쓰면 안 되는 경우를 정의한 '두음법칙'(1988년 고시 한글맞춤법)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최용해', '이설주'가 맞는 표기라는 것이다.

 통일부 홈페이지에 있는 류길재 장관 이름 표기.
통일부 홈페이지에 있는 류길재 장관 이름 표기. ⓒ 톻일부
그런데 사람 이름에 두음법칙의 예외를 인정하는 경우는 남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버들 류'(柳)를 성으로 쓰는 야구선수 류현진, 배우 류승범과 류시원도 그렇고, 류길재 통일부장관도 '유길재'가 아니라 류길재다. '새그물 라'(羅)를 성으로 쓰는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이름도 각종 보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성씨들은 호적 등 가족관계등록부에도 그대로 쓰인다.

국립국어원 기준으로는 이름에도 두음법칙을 지켜야 하는데, 류씨와 라씨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건 지난 2007년 대법원 결정 때문이다. 사람의 성씨는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인데, 기존에 쓰던 표기를 못 쓰게 하는 건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가족관계등록 예규가 그 해 8월부로 개정돼 류·라·리·려·림 등도 호적상 성으로 쓸 수 있게 됐다.

국립국어원은 남한에서는 2007년 8월부터는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 1992년의 기준을 북한 인명에 적용한 것이다. 국립국어원 설명에는 북한 인명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두음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부분은 없다.

통일부는 '류·라·리·려·림' 그대로

방침 자체에 모순이 있으니 잘 지켜질 리가 없다. 정부 부처 중에 북한 인명을 가장 자주 쓰는 곳은 통일부다. 국립국어원의 방침이 왔지만 통일부의 공식 자료들에서는 '류·라·리·려·림'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통일부 정세분석국이 매일매일 북한 방송을 모니터링, 요약해서 내는 '북한소식' 6월 2일자만 봐도 리영수·로성실·리향·류수연·리성현 등 사람이름에 북한표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부가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통일부는 2012년부터 '북한 주요 기관·단체 인명록' 등의 연감에서도 북한 인명을 북한 표기대로 쓰고 있다.

이렇게 하자고 건의했던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 인명을 북한에서 사용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은 정보관리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북한 인명에 두음법칙을 적용해 '최룡해'를 '최용해'로 표기하면, 원래 북한 이름이 '최룡해'인 사람과 '최용해'인 사람이 한국에서는 동일 인물이 돼 버린다"며 "그래서 북한 인명에 두음법칙을 적용하게 되면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 원명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돼 북한 인물 분석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 수석연구위원은 "북한 지명도 기본적으로 북한 명칭대로 표기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에 부합한다고 본다"며 "중국 수도를 '북경'에서 '베이징'으로, 일본 수도를 '동경'에서 '도쿄'로 해당 국가에서 발음하는 대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처럼 북한 지명도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발음하는 대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국립국어원 나서기 전, 국정원이 먼저 "우상화 용어 손질"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북한 인명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통일부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북한 인명 표기에 대한 나름의 방침 정리가 끝난 상황에서 국립국어원이 뒤늦게 '교통정리'에 나선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뜬금없는 교통정리가 나오게 된 배경도 영 석연치는 않다. 단순히 맞춤법 통일 문제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적대감' 때문 아닌가 하는 정황도 있다.

국립국어원 방침이 나오기 전, 이 방침을 먼저 실행한 곳이 있다. 국가정보원이다. 지난 달 28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국립국어원에 앞서 북한 인명에 두음법칙을 적용했다. 국정원은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특사 최룡해의 동향을 담은 국정원 관련 자료에서 리설주는 '이설주'로, 최룡해는 '최용해'로 썼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은 '적군'으로, 북한의 국립묘지 격인 '대성산 혁명열사릉'은 '대성산 공동묘지'로 표현했다.

<중앙>은 이를 "남재준 국정원장 체제에서 시작된 변화"라고 평가하면서 "북한의 우상화·선전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쓰는 건 문제라는 판단에서 손질한 것"이라는 국정원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또 국정원은 경찰 공안부서와 군 정보사·기무사 대북부서가 이미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했고 이를 통일부 등 정부 부처로 확산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두음법칙#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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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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