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욥기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그 진의와는 상관없이 식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며, 창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공통사이기에 종교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구절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지금은 아니지만 창대하리라는 꿈을 꾸는 것을 불경시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출근 전 그곳 골목길을 걷는다. 사람들이 다 떠난 것 같았던 그곳임에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들이 켜켜이 남아있다.
그 증거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화분에 심겨진 초록생명들이다. 그냥 먹을 수 있는 푸성귀나 심을 것 같은데도 먹을 수도 없는 꽃과 나무들이 많다. 그들이라고, 꽃을 사랑하는 마음, 꽃을 심고 가꾸며, 그들을 보고 "예쁘다!"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없을까?
내 생각이 문제다.
어제는 퇴근길에 다소 우울한 소식을 들었다.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80넘은 노구의 삶임에도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식이 딸렸다고 최저생계비를 지급하지 않아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이들이 많다는 소식이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폐지를 주워파는 것인데,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폐지를 모아도 만 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곳, 다는 아니지만 그런 이들이 제법 많은 곳이 거여동재개발지구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개발이 미적거리는 사이 많은 이들이 떠났고, 동네는 흉물스러워졌다.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재개발이 된들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오랜만의 단비에 초록생명들은 더욱더 푸른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작은 비도 막지 못하는 지붕, 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비 정도는 애교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외로운 사람끼리 위로하듯 그렇게 허술한 집들끼리 담장을 기대며 작은 라디오 소리까지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를 보면서 며칠전 현충일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6월 항쟁을 기념한 태극기일지도 모르겠다. 태극기는 그렇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다.
이들이 어디에 살든지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건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위해서 무얼하고 있는가?
나즈막한 슬레이트지붕 위 저 초록생명에게라도 맘껏 빛의 자유를 누리게 한 이는 누구일까? 저런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을 터인데, 늘 그자리를 맴돌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대충 살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몫을 빼앗아가는 이들이 있어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들에 마음이 우울해진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그렁저렁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어야 행복세상일 터이다. 그렇게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강요당하고, 삶을 위협당한다면 국가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좁은 골목에도 제법 큰 나무가 서있다. 저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전원에 살았더라면 아주 예쁜 화단을 가꾸고 살았을 것이다. 지난 밤부터 내린 비 때문인지 후덥지근함은 사라졌지만, 눅눅해서인지 매쾌한 연탄가스 냄새가 골목길을 어슬렁 거린다.
사람이 떠난 집이다. 그곳에 더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화마가 휩쓸고 간 뒤 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해서 그곳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수리를 한들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랴 싶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지도 모르겠다. 어릴적 뛰어놀던 곳이지만, 난 그곳에 대해서 너무도 모른다. 그저, 껍데기만 알 뿐이다.
그래도 피어난 꽃은 어디에 피든지 다르지 않다. 그것이 희망의 사인이다. 그곳에 꽃이 피어나는 한 희망도 피어날 것이다. 그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주술같은 말씀이 이 곳에 이뤄지길 바라자.
거여동재개발지구의 낮은 지붕들 위로 거대한 첨탑 십자가들이 즐비하다. 그들은 그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재개발이 되면 종교부지를 받을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이 자신들보다 더 깊게 욥기의 말씀이 이뤄지길 소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