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6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광주전라입니다. [편집자말] |
대한제국은 1899년 5월 1일 전북 군산을 개항하면서 특정 국가의 독점을 막기 위해 각국 조계지(외국인거주지) 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일본은 재빠르게 군산을 독차지했다. 이어 공원에 신사(神社)를 짓고 관공서, 금융기관, 학교, 도서관, 병원, 기차역, 쌀 창고, 경마장, 공회당, 영화관, 절, 교회, 체육관, 공설운동장, 백화점 등이 들어서는 근대 도시를 조성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 사람이 군산으로 몰려오고 일본인 상가와 여관, 회사 건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빈손으로 들어온 그들은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개설한 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 등을 가르는 1조 통~9조 통의 가로망은 국내에서 유일한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이다. 일제는 군산을 인구 5만, 당시로는 대도시로 계획했다.
간만(干滿)의 차에 구애받지 않고 쌀을 선적하기 위한 축항공사(1905~1938)가 4기로 나눠 축조되고, 군산은 해가 다르게 확장됐다. 상점들도 활황을 누렸다. 그러나 소득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인본인이 부를 누릴수록 조선인은 피폐해지는 식민지 경제체제에서 발전을 거듭하던 군산은 일제가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는 30년대 후반부터 성장을 멈췄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1945)은 됐지만 한국전쟁으로 국가의 산업기반 시설이 대량 파괴됐다. 유엔 원조에 의한 전후 복구시기를 거쳐 우리 정부에 의해 개발이 이뤄진 60~70년대, 5·16군사쿠데타 이후 추진된 1차~5차 경제개발에서 군산은 철저히 소외됐다. '불 꺼진 항구'로 전락한 군산은 적산가옥(이하 근대건축물)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유한 도시가 됐다.
현재 군산에 남은 근대 건축물은 일반 가옥을 비롯해서 상가, 관공서, 은행, 관사, 사찰, 창고 등 모두 170여 개. 그중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들르는 옛 군산세관 청사, 이영춘 가옥, 시마타니 농장 금고, 구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 사택, 신흥동 일본식가옥(히로쓰가옥) 등을 찾았다.
식민 지배 아픔 고스란히 간직한 구 군산세관 청사
위 사진은 일제 수탈의 창구로 식민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 군산세관 본관(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이다. 1908년(순종 2년)에 지어진 군산세관은 개항 후 일본 화물선이 밀려들자 군산항 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각국 거류지 회사에서 조선 정부에 건의하여 공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 경제는 파탄 상태로 대규모 공사를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나라 재정이 바닥나자 세관 용지로 사용할 강안 매립공사, 고정 잔교 설치 등이 목적이었던 제1차축항공사(1905~1910)가 연기됐다. 그러나 일본과 조선의 중계무역에 목숨을 걸고 있던 군산의 일본 상인들은 라포트라는 프랑스 세관 책임자를 매수하여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당시로는 거금인 8만6000원을 투자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구 군산세관 본관(69평)은 단층 건물로 여성스러우면서도 무게감 있는 외관을 보여준다. 내부는 효율성을 위해 복도가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다. 천정의 화려한 조명등 흔적으로 보여 각종 연회 행사장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사무실과 선박 입출항을 감시할 수 있는 망루 2개 동으로 구성돼 있었으나, 1990년대 초 새 청사를 신축하면서 망루는 철거됐다.
건물 출입구 바닥은 화강석이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에 지붕은 우진각과 박공 형태가 혼합된 형식으로 물고기 비닐 모양의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마감해서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사용한 유럽 중세 건축양식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등과 함께 건축사는 물론 향토사적 가치가 높다.
군산시 개정동 '이영춘 가옥'
군산 원도심에서 승용차로 10분 쯤 떨어진 개정동에 이영춘 가옥(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이 있다. 구 개정병원 동쪽 언덕에 자리한 이영춘 가옥은 소작인만 2만 명(3000세대)에 여의도(75만 평)의 10배가 넘는 농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영춘 가옥은 1920년대 건물로, 주로 일본과 경성(서울)에 거주했던 구마모토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가옥을 짓고 일 년에 두세 차례 농장을 방문할 때만 거처하며 별장처럼 이용했다고 한다. 해방 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면서 건물 이름도 '이영춘 가옥'으로 불리었다. 이 가옥은 군산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보존이 잘 된 건물이라는 게 향토사학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이영춘 가옥은 목조 1층 건물이다. 건물의 기단과 벽난로 굴뚝은 호박돌을 쌓아 만들었고, 문틀에서 바닥재까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서 수려함을 더했다. 외벽 상부는 회반죽 뿜칠로 마감해 색채와 질감이 목재와 조화를 이룬다. 그 하부에는 백두산 낙엽송을 절반으로 켜서 짠 걸침턱맞춤의 귀틀이 덧대어져 있다.
양식(응접실)과 한식(침실), 일식(거실) 건축양식이 절충된 가옥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은 건물 설계는 프랑스인, 감독은 일본인, 시공은 조선인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독특한 사례를 보여주는 이영춘 가옥은 건축예술 면으로도 인정받아 <빙점>, <야인시대>, <모래시계>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볼수록 아름답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가옥이다. 내부는 이 박사가 생전에 입었던 옷과 서적, 서류,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황제 일가가 사용했다는 가죽 의자를 비롯해 천장의 샹들리에, 큼직한 벽난로 등은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꼼꼼한 필체를 보여주는 친필 병풍과 환자를 진료하는 사진,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진료용 손가방 등도 볼 수 있다.
약탈 문화유산 집결지였던 시마타니 농장 금고
군산에는 일본에서 소자본을 가지고 들어와 농지를 헐값에 매입하거나 강탈해 부자가 된 일본인 졸부가 많았다. 그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대한 저택을 짓고 값나가는 예술품을 약탈하거나 수집했다. 결국 군산은 문화유산 집결지가 됐다. 이런 과거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 군산시 개정면에 있는 발산초등학교 뒤뜰이다.
발산초교 뒤뜰에는 전북 완주군 봉림사 터에서 옮겨왔다는 5층 석탑(보물 제276호)과 연꽃잎과 용무늬가 어제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여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등(보물 234호) 외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육각부도(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5호)를 비롯한 수십여 점의 보물급 석조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웃하고 있는 시마타니 농장 금고(국가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이동해 보자. 이곳은 일본인 대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전국 각지에서 불법으로 수집한 문화재급 유물을 보관했던 창고다. 부피가 작은 고서화나 도자기 등은 금고에 보관하고 석조물은 야외에 전시했다니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대농장주만 20여 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힘겨루기라도 하듯 경쟁적으로 조선의 석조 예술품을 불법으로 취득, 정원을 꾸미는데 사용했다. 국보급 석탑과 석등을 자신이 경영하는 유곽이나 요정에 장식품으로 세워놓은 일본인도 있었다. 불법 도굴과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총독부마저 이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구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 사택
군산시 금동 오르막길에 자리한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미창·米倉) 사택(향토문화유산 제17호)은 대지 95평 건평 40평으로 1935년에 지은 전형적인 일본식 단층 목조주택이다. 일본 가옥의 상징인 겹처마와 쓰기목을 사용한 현관을 지나면 복도를 따라 6개의 방과 욕실, 창고,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며 지대가 높음에도 집안에 우물이 있는 게 특징이다.
원형이 잘 보존된 이 사택은 미창 군산지점장 사택이라는 의견과 대한통운 군산지점장 사택이라는 의견, 마루보시(丸星) 군산지점장 사택이라는 의견으로 갈린다. 그러나 모두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1928년 조선운수주식회사로 출발한 마루보시는 1962년 미창과 합병하고, 조선총독부 주도 하에 1930년 창립된 미창은 대한통운 전신이기 때문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만개한 철쭉과 기기묘묘한 형상의 정원수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67년 이사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집주인 윤씨(77)는 아내와 정원 가꾸기가 주요 일과라고 말했다. <아홉 살 인생>(감독 윤인호) 등 많은 영화촬영을 했으며 근대 건축물과 근대문화를 공부하는 학생과 교수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군산에서도 신흥동, 월명동, 신창동 지역에 원형을 보존한 일본식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세관 인근에 있던 부청(시청)이 1928년 지금의 이성당 앞 명치정(중앙로 1가)으로 신축 이전하고, 시가지가 월명산 아래까지 확장되는 1930년 이후 들어선 건물들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0년대 초까지도 이 지역은 셋집을 얻기 어려운 고급 주택가로, 백에 아흔아홉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등록문화재 제183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가옥은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야시키(屋敷) 형식 2층 목조건물(총면적 276.76㎡ 건축면적 216.86㎡)로 군산부 협의회 위원이며 포목상을 경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廣津吉三郞)가 1925년에 지었다는 저택이다. 1930년대 건물이라는 구전도 전해지며, 한때는 거주인 이름을 붙여 '김혁종 가옥' '히로쓰 가옥' 등으로 불렸다.
미창 사택에서 신흥동 일본식 가옥으로 향하는 골목길은 왜색 기운이 짙어 일본 나가사키(長崎)시 변두리 언덕길을 산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건 전 총리가 제13대 총선 때(1988) 민정당 후보로 군산에서 출마, 선거운동을 하느라 몇 개월 묶었던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과 일식 가옥(마찌야)이 드문드문 보이고, 100년은 됐음직한 허름한 나가야(상가) 건물이 많아서다.
장중한 분위기의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장군의 아들>, <타짜>, <가비>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밖에서 보면 기와를 얹은 붉은색 담장에 대문이 파란색이어서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건물이 눈에 잘 띄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그러나 처음에는 회벽이었고, 대문도 자연 그대로 나무색이었다 한다. 정원에 있던 연못과 돌다리도 사라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목재와 기와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다는 가옥 본채에는 'ㄱ' 모양으로 딸린 건물이 두 채 있고,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과 일본식 석탑, 내실로 들어가기 전 손을 씻었다는 수수발 등이 놓여있다. 1층에는 온돌방 6개와 부엌, 식당, 화장실 2개, 창고, 다다미방 한 개가 복도와 연결돼 있고, 2층에는 오시이레를 갖춘 2칸의 다다미방이 있어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역사와 일본인 지주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해방 후 히로쓰가 빈손으로 강제 귀국하고 적산가옥이 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호남제분 이용구 사장 가족이 살다가 한국제분 소유로 바뀌었다. 이 집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히로쓰는 자녀들이 결혼하면 거주할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집안에 공간을 많이 확보해두었다고 한다. 분노에 앞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