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 서울 한남동에서 용인 죽전으로 용감하게 이사 온 단국대학교를 지나 43번 국도를 타고 광주(廣州) 방향으로 10분 정도 달리면 오른쪽에 '한국등잔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에 들어서 정몽주의 무덤을 지나면 원통형의 단아한 건물이 나타난다.
직업이 의사인 김동휘 선생이 수십 년간 전국을 돌며 모은 등잔과 각종 민속품들이 전시실을 채우고 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등잔 값이 싸서 수집하기가 비교적 쉬웠는데, 최근에는 그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한국등잔박물관이 전국의 등잔 값을 올려놓은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더니 관계자들이 웃고 말았다. 전문직 의사가 전통 민속품에 쏟은 열정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문화적 소양을 느낄 수 있다. 한 인간으로 품위 있고, 그윽하게 나이를 먹어가길 바라는 건 비단 나만의 꿈이 아닐 것이다.
'악마의 배설물'로 여겨졌던 석유
석유가 보급되기 전, 조선에서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초를 조명기구로 사용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릇모양의 종지에 참기름, 콩기름, 아주까리기름, 돼지기름, 생선기름 등을 붓고 심지를 띄워 불을 붙여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등잔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는 꽤 오래된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등잔이라고 하면 흰색의 사기 재질에, 구멍이 뚫린 뚜껑을 덮고, 그 구멍으로 심지를 박는 '석유등잔'을 떠올린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호롱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석유등잔을 까마득하게 먼 옛날에 사용했을 민속품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옛 정겨움을 느낀다. 간혹 사극의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석유'등잔은 개항(1876) 때 석유가 조선으로 처음 수입되면서 제작된 조명 기구이다(1880년에 개화지식인 이동인이 석유를 처음 들여왔다는 설도 있다).
고대인들은 석유를 '죽은 고래의 피', 또는 '악마의 배설물'로 생각했다. 성경에서는 석유를 노아의 방주에 방수용으로 썼고,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은 석유를 정제할 때 얻어지는 아스팔트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들었고, 바빌로니아인도 아스팔트를 건축에 접착제로 사용했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싸는 천에도 아스팔트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근대에 석유는 극히 제한된 분야에서 사용됐다.
미국에서는 조명기구의 연료로 18세기 이후 고래의 기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남획으로 고래의 수가 줄어들면서 고래 기름 값이 오르자 1859년 미국 펜실바니아주 암유회사의 에드윈 드레이크(1819~1880)는 조명기구용 연료를 구하기 위해 땅을 굴착하여 석유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석유를 최초로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유전 개발을 통해 석유 대량 공급 시대의 문을 열었다.
<신기전> <방자전>에 나온 석유등잔은 제작진 실수19세기 말, 개항기가 되면 청, 일본, 영국, 러시아에서 200여 품목의 물건이 조선으로 수입되었다. 이때에 봇짐장수들이 집집마다 석유, 성냥, 구리무(화장품)등의 수입품을 팔면서 석유는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석유(石油)'는 말 그대로 '돌을 짜서 만든 기름'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청 상인들이 러시아산 석유를 사다가 팔았는데, 그을음과 냄새가 적고 조명기구의 불빛이 밝아서 인기가 좋았다. 또 소비자들이 러시아산 석유보다 질이 더 좋은 미국산 석유를 찾게 되자, 타운젠트사가 캘리포니아산 석유를 독점으로 수입해서 팔았다.
그런데 석유는 인화성이 강하기 때문에 등잔의 뚜껑이 필요했고, 외국상인들이 석유등잔을 만들어 보급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유등잔은 지방의 산골마을까지 퍼져나갔고 생활필수품이 됐다.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황현은 <매천야록>에 "석유가 나오면서 산이나 들에 기름 짜는 열매는 번성하지 않게 되었고, 온 나라 안에 석유로 연등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됐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15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신기전>(2008), 춘향전을 각색한 영화 <방자전>(2010) 등에 나오는 석유등잔은 제작진의 실수다.
내 고향(충남 당진 삼봉리)에는 1977년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 이전에는 남포등이나 석유등잔을 사용했다. 서울 토박이인 내 아내에게 그때의 추억을 얘기하면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석유등잔이 아주 먼 옛날에나 사용했을 물건일 것이라는 착각과 자신이 살았던 동시대에 그런 물건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겹치면서 생소하게 느끼는 것이다. 한국은 '비동시성의 동시성'를 지닌 사회이다.
덧붙이는 글 | * 참고 자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1991
이이화,「성냥과 석유를 처음 쓰던 시절」,『우리 역사의 7가지 풍경』,역사비평사, 1999
김윤희·이욱·홍준화,『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대한석유협회 홈페이지 (www.petroleu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