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파 브랜디에 취해 늦잠을 잤습니다. 산을 내려올수록 나태해지는 것 같습니다. 일어나 식당에 가니 가이드와 포터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 저를 보고 황급히 멈춥니다. 아마 어젯밤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일정이 많이 남았기에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네팔 사과의 수도 '마르파'아침 식사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마을 골목은 좁지만 박석으로 포장되었으며 매우 청결합니다. 골목의 집은 사과꽃처럼 하얀색으로 도색되어 있습니다. 마을 앞에는 칼리간다키 강이 흐르며 강과 마을 사이에는 과수원과 논이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습니다. 마르파를 '네팔 사과의 수도', '좀솜 지역의 압구정'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마을 뒤편 절벽 난간에는 곰파(사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곰파에 오르기 위해서는 100여개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이 곰파는 티베트 불교 성자인 '마르파'를 기념하기 위한 사원입니다. 그는 지금도 고향 마을 뒤편 절벽에서 마을을 지켜보며 바람과 나팔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트레킹을 하기 전, 박범신의 소설 <나마스테>를 읽었습니다. 소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 네팔 남자 '카밀'과 미국의 흑인 폭동 때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은 '신우'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자본주의 병폐를 지적하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책에서 주인공 '카밀'의 고향이 '마르파'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계곡을 따라마르파(2680m)를 출발하였습니다. 오늘은 칼로파니(2530m)까지 갈 생각입니다. 좀솜에서 칼로파니까지 이어지는 칼리간다키강의 협곡은 동쪽으로는 안나푸르나(8091m) 연봉들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다울라기리(8172m)에 접해 있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계곡입니다. 협곡이 깊은 만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바람도 강해지겠지요. 바람이 불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13일이 지났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오랜 시간 걷고 있습니다. 이제 걷는 것이 생활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트레킹 초반에는 감기 때문에 콧물이 흘렀으며 사타구니 사이의 마찰로 피부가 헐어서 걷는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두 주가 지나니 몸의 모든 기능이 자정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웅장한 다울라기리를 바라보며 칼리간다키강을 따라 걷습니다. 해발이 낮아짐에 따라 산야는 황량함에서 벗어나 푸름이 짙어가고 있습니다. 툭체를 지나면 강폭이 넓어지며 투쿠체(6920m)와 다울라기리(8167m)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겨울 건기라 신작로 보다는 자갈이 수없이 깔린 강바닥을 가로질러 걷습니다.
트레킹은 자신의 '두 발'로신작로를 걷다 보면 차량이나 오토바이를 만납니다. 트레커는 도로 옆으로 피해 차량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합니다. 겨울철 건기여서 메마른 대지에서 흙먼지가 피어나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트레커는 코와 눈을 가리고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편리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두 발로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주민들과 인사와 인심을 나누는 것도 걸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편함과 먼지를 감수하면서도 버스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라르중(2570m)에 도착하기 전 장례식 모습을 보았습니다. 강가에 많은 동네 주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화장(火葬)을 위해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곡을 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화장이 끝나면 타다 남은 장작과 재를 강에 버린다고 합니다. 윤회를 믿는 히말라야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칼로파니가 목적지입니다. '칼로파니', '따도파니', '고라파니'는 앞으로 제가 숙박할 마을 이름입니다. '파니'는 물을 의미합니다. 칼로파니는 '검은 물', 따도파니는 '따뜻한 물', 고라파니는 '말에게 물을 주는 곳'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자락에서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를 걷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이 그립습니다칼로파니에 도착하였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롯지는 깨끗하며 편리합니다. 숙소에는 전기 온수기가 있으며 식당에는 영국 프리미어리그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서둘러 샤워와 빨래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축구 경기를 감상합니다. 히말라야를 걷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이 그립습니다.
로지 옥상은 무척 전망이 뛰어납니다. 앞쪽에는 안나푸르나l이, 뒤쪽에는 다울라기리와 투크체 피크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두 주 동안 매일 산을 바라보았지만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매일 접하는 산의 모습은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입니다.
칼로파니는 일행 중, 서울에서 오신 분의 가이드인 '자야'씨의 고향입니다. 숙소 바로 앞이 고향집입니다. 자야씨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어머님과 여동생만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과 오빠 모습에 어머니는 입이 귀에 걸려 있습니다.
저녁은 백숙으로 하였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두 입맛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숙 제의에 모두 찬성하였습니다. 양념이 없어 소금과 마늘만 넣었는데도 국물이 환상적입니다. 어젯밤 마르파에서 술을 과하게 마셨기에 아쉽지만 참기로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좋지 않겠지요.
트레킹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세 밤만 지나면 다시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시작할 때 마음처럼 마무리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