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잔인하게 묘사된 성범죄 사건이 잇따라 언론에 노출되면서 성폭력 대책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거셌습니다. 국회는 부랴부랴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작년 말 성폭력 관련법에 대한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벌였습니다. 작년 12월 18일 개정된 성폭력 관련법 대부분이 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 19일 시행됐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제도에 대한 시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변화된 법의 내용과 의미를 살피는 '바뀌는 성폭력 관련 법, 이것이 궁금해요!'를 4편에 걸쳐 싣습니다. - 기자 말
"성폭력 피해 신고가 늘면서 남성 피해자도 드러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남성은 성폭력 피해자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부분에도 변화가 있을까요? 또한 기존에는 성폭력 피해로 보지 못했는데, 앞으로 성폭력으로 인정되는 등 처벌 범위가 확대되는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성폭력은 불평등한 성문화와 위계적인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이기에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남성 간 성폭력은 남성성의 증명과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또 엄격한 위계질서 안에서 가해자의 논리인 "남성문화의 특수성" "성폭력이 아니라 친밀함의 표현"이라는 말로 성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여성이 아닌 성폭력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은폐했습니다. 법을 보더라도 기존 형법에서는 강간의 객체를 '부녀'로 규정했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처벌법)에서는 강간 및 간음 행위의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했습니다.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수정성폭력 범죄에서 여성이 아닌 자를 법적인 피해자로 인정한 것은 2011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개정이 처음입니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여자 아동·청소년'에서 '아동·청소년'으로 개정했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군대 내 성폭력과 같은 남성 성폭력 문제나 성전환자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 법적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6월 19일부터 시행되는 형법 및 처벌법, 군형법상 강간죄의 객체는 모두 '사람'으로 변경되어 법적으로 강간 피해자 범위가 확대됐습니다.
이러한 개정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로 여성만을 생각했습니다. 형법상 강간죄에서 피해자가 '부녀'로만 한정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성폭력은 남-여뿐 아니라 여-남, 여-여, 남-남 사이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폭력 범죄 객체의 수정은 단순한 '피해자 확대'를 넘어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로 봐야 합니다.
유사강간죄 등 신설되는 범죄도 있어 19일부터 비장애 성인을 대상으로 한 유사강간죄도 시행됩니다. 처벌법과 아청법에는 이미 장애인, 13세 미만의 아동, 19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사강간죄가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가 성인 피해자의 입이나 항문 등에 성기를 넣거나 질, 항문에 손가락이나 신체의 일부, 또는 도구를 삽입하는 행위를 했을 때 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일 개정법이 시행되어 비장애 성인을 대상으로도 유사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고, 그 형량은 강간죄보다 낮고 강제추행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이밖에도 처벌 범위가 확대되는 개정 내용도 있습니다. 그동안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죄는 일반 강간죄보다 엄격하게 처벌했는데, 친족의 범위는 '4촌 이내의 혈족 및 인척 관계'로 제한됐었습니다. 하지만 19일부터는 기존 촌수 요건에 충족하지 않는 '동거하는 친족'도 친족관계강간죄의 친족범위에 포함돼 처벌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양해지는 성폭력 범죄 유형에 따라 새로 처벌되는 범죄도 있습니다.
그동안 '카메라이용촬영죄'는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을 하는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이러한 촬영물을 배포해도 처벌할 수 있습니다. 성적 만족을 목적으로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 찜질방과 같은 공공장소에 침입한 자가 퇴거 요구를 받고 불응하면 처벌하는 조항도 신설됐습니다.
그동안 공공장소를 침입한 자에게는 주거침입죄를 적용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침입한 자가 강제추행이나 카메라이용촬영 등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범죄행위로 처벌하기 어려웠는데 이러한 처벌 공백이 보완됐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최영지씨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