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결연한 말투와 눈빛에는 짙은 고통이 어른거렸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될 동안 제가 몰랐었잖아요"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고백은 죄책과 회한의 슬픔이 묻어났고,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하느님이 저를 이렇게 쓰시려고 제 아들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에선 어떤 숭고한 소명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잃은 고통, 죽음 같은 슬픔 그리고 이런 지독한 비극에 맞선 결연한 소명, 승민이의 어머니는 마치 '못다 푼 역사의 과제를 남기고 간 열사의 어머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2012년 12월 20일, 중학교 2학년 권승민군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들의 자살로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교직을 떠났고,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그 고통스러운 공간에 남아 학교폭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로 하였다. 가족들 모두 지독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아들이 남긴 두 장짜리 유서엔 자신을 가해한 친구들의 범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무차별적으로 때렸다. 라디오를 들고 벌을 세우고, 선을 뽑아 목에 묶어 땅바닥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했다. 승민이는 친구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교사인 부모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복잡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들만의 은밀한 세계이 책 <학교의 눈물>은 올해 1월에 SBS를 통해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동명의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방송에선 입체화된 영상이 더 큰 충격과 감동을 선사한다면, 책은 세세하고 치밀하게 아이들의 세계를 분석하고 진단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방문을 걸어 잠근 자녀의 낯선 경계가 두려운 부모들은,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법정에 선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우리가 짐작하는 비행청소년이 아니었다. 일진이나 '짱'이라고 하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학교에서 반장이나 부반장을 한 번 정도 해 본 아이들이다. 그들의 부모도 대개 평범한 사람들로 자신의 아이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다닐지는 꿈에도 몰랐다.
처음부터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은밀한 세계에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받으며 병들어간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학교 시스템은 그들의 상상력과 꿈을 앗아간다. 어떤 아이들은 숱한 폭력을 견디지 못한 채 영원한 피해자로 살지 않기 위해 조금씩 병들어가고, 어떤 아이들은 가슴속에 쌓아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또 다른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가해자의 44%가 피해 경험자이며(대구대 박순지 교수 연구 논문, 2009), 피해자의 31%가 자살을 생각한다(청소년폭력예방재단, 2011년). 승철이는 '담배셔틀'이었다. '셔틀'이란 인터넷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토스 종족의 병력 수송선(Shuttl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이들의 세계에선 일진 그룹에게 매점에서 빵을 사다 주는 빵셔틀, 담배를 사다 바치는 담배셔틀, 숙제를 대신 해주는 숙제셔틀, 친구의 스타킹에 구멍이 났을 때 자신의 스타킹을 벗어주는 스타킹셔틀 등으로 분화된다.
키가 180cm가 훌쩍 넘는 듬직한 체구의 승철이는 외모와 달리 너무 착하고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다. 중학교부터 시작된 폭력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승철이를 괴롭혔다. 승철이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날이면, 집에 와서 방의 벽과 집안의 물건을 주먹으로 부쉈다. 친구에게 표현 못 했던 분노를 가족에게 폭발시키는 것은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전형적인 후유증 중 하나다.
피해 아이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는 피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너도 잘못이 있으니까 피해를 당했겠지" 또는 "네가 나약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들에게 발견되는 소심함과 우울함은 폭력의 피해 후유증인 경우가 많다. 피해자 대부분은 낮은 자존감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유아기에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부모와의 애착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최초의 경험이 되는데, 애착이 불안정한 아이는 성장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된다. 단짝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까지 당하면 자존감은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우울감이 싹튼다. 그런데 이런 낮은 자존감은 가해 아이들에게도 대부분 발견된다. 집에서 강한 훈육을 받거나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기보다 약한 친구에게 보복한다. 더 놀라운 것은 가해와 피해 아이들의 부모들도 어김없이 자존감이 낮거나 우울감이 높다는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학교폭력 회복 프로젝트 '소나기학교'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이 아이들에게 후유증을 남기지 않으려면 진정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화해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 사이에서만 용서와 합의가 이루어지고, 가해 아이가 다른 학교로 추방되거나 피해 아이가 보복이 두려워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으로 대부분 끝난다. 그리고 피해 아이 중 상당수는 다시 가해자가 된다.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란 개념을 소개하는데, 어떤 범죄 행위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것 못지않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 상처에 대해 공동의 치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빌며 그 상처를 치유해나가고, 피해자는 치료를 통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생하는 공동체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0대의 경우, 그 또래 집단의 특수성과 이미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관계 속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할 우려도 있어서 직접적인 학교폭력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용서와 화해는 쉽지 않다. 이에 방송 관계자는 전혀 별개의 학교폭력 사건을 겪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참여하는 학교폭력 회복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른바 '소나기학교'의 시작이었다.
소나기학교라는 이름에는 아이들이 겪은 학교폭력이란 이 위기가 한여름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해달라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에 방송 관계자는 14명의 학교폭력 가해 아이와 피해 아이를 모았다. 그리고 폐교를 찾아 감시와 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 학교 공간이 아닌 자유와 개성과 치유의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담임과 부담임, 상담교사, 진로와 음악 등의 특강교사, 아이들과 숙소생활을 함께할 대학생 멘토까지 모두 32명의 선생님께서 함께 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8박 9일간의 소나기학교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각기 개성과 본능을 드러내며 위기를 겪기도 하고 습관적 욕설과 폭력으로 아이들 간의 위계가 표면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태롭던 소나기학교는 차츰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아이들은 자신을 철저히 존중하고 배려하는 선생님들의 진심이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핸드밸 합주를 통해 '세상에 쓸모없는 소리는 없다'는 것과 사람과 사람 간의 연대를 배운다. 또, 상담을 통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지연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고, 심리극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정서적 공감 능력을 배웠다. 소나기학교는 이 세상에 없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학교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나기학교'
부모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감동적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소나기학교도 끝이 났다. 이 책은 아이들이 카카오톡 채팅방을 만들어 계속 교류하고 있으며, 다들 순조롭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담담히 전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소나기학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학교는 예전 그대로일 것이다. 방송이 나간 뒤, 가해 아이를 옹호했다는 비판 여론도 뜨겁게 일었다고 한다. 사회는 여전히 학교폭력의 책임을 가해 학생들에게만 전가하고 그들을 엄벌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학교폭력은 내 아이와는 상관없다고 '철썩'같이 믿는 당신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그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경고하고 일깨우고자 한다. 학교폭력과 궁극적으로 맞서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나기학교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부터 그리고 부모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한다.
전문가는 조언자일 뿐, 아이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 것은 결국 부모다. 어떤 경우에도 먼저 아이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334쪽) 덧붙이는 글 | 학교의 눈물 | SBS스페셜 제작팀 (지은이) | 프롬북스 | 2013년 5월
이 기사는 저의 블로그(http://soli021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