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불법 정치·선거개입 사건에 이어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록 발췌본 공개로 파장이 커지고 있지만 청와대는 '책임회피형'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는 21일, 국정원이 전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담록 일부 내용을 여당 의원들에게 공개한 것에 대해 조직적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남재준 국정원장 '개인플레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이 정상회담록 발췌본 열람을 허용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상의했느냐'는 질문에 "그게 청와대에서 허락할 일이냐, 청와대에서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남재준 개인플레이?... 청와대, 정말 몰랐을까
청와대는 회담록 공개에 따른 법적 책임론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국정원 내에도 법률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검토에 의해 (공개)했을 것"이라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공개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결단을 내린 쪽에서 질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또 국정원의 회담록 공개 사실을 사전에 보고 받은 적도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후에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이날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남재준 국정원장이 회담록 발췌본을 국회에 가져갈 때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답했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도 "(사전에) 국정원장으로부터 보고는 받지 않았다"며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국정원의 사전 보고 여부에 대해 "왜 그것을 청와대에 보고해야 하느냐"며 "각 기관이 법적으로 문제 있는지 없는지 따져서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취지 발언' 진실 여부 등은 지난 대선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고, 국정원이 대선 불법 개입 사건에 휘말린 지금 시점에서 정치권에 큰 파장을 몰고 올 회담록 공개를 단독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남북정상회담록 공개가 적법하냐는 법률적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야당과의 극한 대립을 무릅써야 하는 일을 청와대의 정무적 검토와 재가없이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에도 침묵... 똘똘 뭉친 당·청
청와대는 또 검찰 수사로 밝혀진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대선에 미친 영향이 미미했고 재판 중인 사안이라는 게 청와대가 내놓은 이유다. 새누리당이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에 대해서 역공을 취했던 논리와 같다. 그동안 여러 차례 엇박자를 냈던 당·청이 이번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한 '원보이스'(하나의 목소리) 원칙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이날 국회 운영위에서 '박 대통령은 대선 때 국정원 대선 개입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 문재인 후보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로 드러날 경우 본인 역시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하에 발언한 것 아니냐'(은수미 민주당 의원)는 질문에 "지금 재판 진행 중인데 선거 개입했다고 결론 내리고 답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구체적인 답변은 피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야당이 제기하는 박 대통령 책임론에 대해 "엄연히 정치의 중심이 국회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자꾸 청와대에 뭘 해결하라, 결단 내리라고 하면 여의도가, 국회가 스스로 작아진다"며 "청와대에 해결의 열쇠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자유지만 정치권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정치권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남북정상회담 회담록 공개 논란에 선을 긋고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오는 27일로 예정된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집중하고 민생 챙기기를 통해 쏟아지는 소나기를 일단 피하겠다는 것이다.
'모르쇠' 한다고 소나기 피해질까... 야당, 박 대통령 정조준하지만 청와대의 인위적인 거리 두기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은 물론 경찰의 축소·은폐 수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취지 발언' 등 남북정상회담 회담록 공개 논란의 최대 수혜자는 박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당초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야당의 공세는 박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이날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박 대통령 책임론'을 거세게 추궁했다. 은수미 의원은 "문재인 후보에게 책임지라고 말씀한 분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사실로 드러난) 지금까지 6개월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다"며 "대선 후보일 때는 자신 있게 책임지라고 하고 대통령이 되니 말바꾸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가권력기관의 대선 개입과 진실 은폐에 대한 분노가 여의도를 넘어섰다"며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국민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는지 직시해야 한다, 국민들은 새누리당과 청와대에 국가권력기관의 헌정유린 사태에 대해 진정으로 엄단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있다"고 정조준했다.
김 대표는 "당면한 국기문란, 헌정파괴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회피하기 위해서 새누리당이 해묵은 NLL 관련 논쟁을 재점화하려는 것은 국익을 무시한 무책임한 시도"라며 "탈법적 NLL 발언록 일부 공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한 법적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