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린 인민군 포로 "좋습니다. 고 선생님, 캡션을 번역해 주세요."
나는 잠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골똘히 바라보던 그 사진을 노트북에 저장하기 위해 다른 사진을 스캔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건넸다. 그는 사진 뒷면의 영문캡션을 훑은 뒤 내가 기록하기 좋도록 천천히 번역했다.
"촬영 일자는 1950년 8월 18일이고요, 장소는 'Somewhere'로 미상입니다. 왼쪽은 이제까지 사로잡은 포로 가운데 가장 어린 북한군으로 이름은 '김태수'입니다. 가운데 사람은 여비서로 이름은 '이수경'입니다. 캡션에는 여비서라고 썼는데 아마도 오기로 그 시절 미군 부대 임시통역이었을 겁니다. 오른쪽 미군 신문관 팔뚝에 미8군 마크가 달린 것으로 보아 미8군 소속 마스터 서전트(Master sergeant)로 곧 계급이 상사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나는 아카이브에서 나눠준 용지에다 고동우가 불러준 캡션 번역문을 연필로 받아 적었다. 이곳에서는 자료조사자가 입장할 때 아예 필기도구를 지참치 못하게 했다. 아마도 아카이브 소장 자료의 훼손을 예방하는 조치로 보였다. 그 대신 자료조사자에게 파란 가로 선의 노트용지와 연필을 제공했다.
나는 고동우가 불러준 대로 캡션 번역문을 노트용지에 기록한 뒤 그에게 사진을 다시 건네받아 막 전원에 연결한 스캐너에 올렸다. 그리고 스캐너 커버를 덮고 마우스로 노트북 화면의 스캔표지에 클릭했다. 그러자 곧 화면에 "문서 덮개를 열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가 뜨고, 이어 스캐너 작동소리와 함께 진도 눈금이 금세 빈 칸을 메웠다. 마침내 나라(NARA)에 소장된 한국전쟁 사진 한 장이 비로소 내 노트북에 저장되었다. 아마도 이 사진은 몇 달 후 한국독자들에게 선보일 것이다.
'코리언 커피'
"오늘 사진은 한국전쟁 초기라 그런지, 다른 때와는 달리 유난히 장소 미상인 'Somewhere'가 많습니다." 고동우가 문서상자의 사진을 계속 꺼내 추스르며 말했다.
"아마 그때는 종군기자들이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지명이 어딘지 잘 몰랐기 때문일 겁니다.""그랬을 겁니다. 특히 전주와 진주 그리고 충주와 청주 등 지명을 혼동한 게 많아요. 그뿐 아니라 상황설명도 잘못된 것이 더러 있어요. 한 예를 들면 우리의 연자방앗간을 걔네들이 'Barn', 곧 외양간으로 번역했더군요."우리는 그런 잘못된 캡션이 나올 때마다 사진을 다시 한 번 골똘히 살핀 뒤 사진 속의 사물과 정황에 맞게 캡션을 정정 기록했다.
"당시 걔네들에게는 한국이 매우 낯선 나라니까 그랬을 겁니다. 마치 이즈음 우리나라 사람이 아프리카 우간다나 콩고에 간 것처럼 말입니다.""그럼요, 당시 걔네들 눈에 한국은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의 나라, 미개국으로 사람들이 길가나 전봇대에다 용변을 보고, 부녀자들이 아무데서나 유방을 꺼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야만국으로 비쳤을 겁니다.""하기는 그때 걔네들 샤워한 물이 미군 부대 철조망 밖으로 흘러나오면 피난민들이 그 물로 빨래했고, 걔네들 쓰레기통을 뒤져 유통기간이 지나 버린 부식들을 아귀처럼 가져다가 꿀꿀이죽을 끓여 먹었지요. 그런 것을 목격한 그네들이 우리를 아주 형편없는 미개인으로 보았을 테지요."그 무렵 나는 대구나 부산 시내 미군 부대를 지나다가 본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
이 시점에서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지요.""아무튼, 그때 우리는 엄청 가난했지요. 그런데다 한국과 미국은 생활풍습이나 문화의 차이로 오역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저도 어느 미국 영화에서 보니까 우리의 숭늉을 '코리언 커피'라고 번역했더군요."의용군 입대나는 스캔이 끝난 사진을 꺼낸 뒤 한 번 사진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나와 나란히 앉은 고동우도 하던 일을 멈추고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몇 살쯤 되어 보입니까?""글쎄요. 열대엿 살? 아직도 젖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그러네요. 그때 저 친구가 아식장총(일명 '딱콩 총', 원명 Mosin-Nagant M-1891)을 멨다면 아마 땅에 닿았을 겁니다.""제 눈에는 마치 수업시간에 장난치다가 교무실로 불러와서 주의를 받는 개구쟁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왼쪽 팔목은 총상인지 붕대를 감았습니다. 수화기를 든 채 포로를 노려보는 미군 신문관이 마치 무서운 학생부 선생님 같고요.""전직은 속일 수 없네요. 나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저 어린 친구가 그 나이에 뭘 알기나 하고 참전했겠습니까. 대부분은 학교에서 비상소집한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붉은 완장을 두른 이들이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자는 선동에 휩싸여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까 거름지고 나서듯' 입대했거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붙잡혀 거의 강제로 입대한 친구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때는 그런 일이 숱했나 봅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죽어간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이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라고요.""그분 말이 맞을 겁니다. 저 어린 소년이 그때 뭘 알고 참전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대부분 주위 분위기에 휩싸여 총을 들었을 테지요.""왜 우리 학교 신용균 교감 선생 아시죠?""그럼요. 내가 재직 때는 수학을 가르쳤지요.""그분은 한국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인민군 남침규탄대회'를 연다고 비상소집하여 등교했더니, 이미 인민군이 진주하여 막상 당일은 '인민군 서울 입성환영대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정부에서 전황을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아 빚어진 해프닝이었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당신 혼자 살겠다고 남쪽으로 도망치듯이 피난을 간 뒤 마치 경무대에서 평상시와 같이 집무하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양치는 소년처럼 백성들에게는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치 말라'고 대전방송국에서 녹음방송한 것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결과입니다. 더욱이 '인민군 서울 입성환영대회' 그 행사장에는 어느새 붉은 완장을 두른 세포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선동하여 인민의용군에 지원 입대케 했다는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일도 있었답니다.""나도 그분에게 그 얘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당신도 어린 나이에 그 의용군 지원 열풍에 휩쓸려 지원하려고 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가 집안의 3대 독자라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죽기 살기로 만류하는 바람에 입대치 못하였고 하더군요.""그분은 전란을 용케 피해 아들 낳아 대를 이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따님만 줄곧 여덟이나 낳으셨지요.""나는 6·25 한국전쟁 당시 열 살로 재동국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집은 계동 휘문중학교 앞에 있었지요. 우리 이웃집에 그 휘문중학교에 다니던 한 형도 비상소집으로 학교에 간 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채 입대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 어머니가 대문 앞에서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는 걸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중학생이나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의 인민의용군 입대는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제가 어느 책에서 보니까 한국전쟁 발발부터 그해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인민의용군 입대자를 최소 15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으로 추산하였더군요.""아무튼 그 시절 의용군 입대자가 엄청 많았습니다."혼란, 혼돈, 회색의 시대
"제가 2005년 남북작가회의 때 평양에서 만난 오영재 시인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그해 7월 하순에 인민군이 전남 강진에 진주하자 곧장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답니다. 현지 인민군부대에서 고작 일주일 군사훈련을 받은 뒤 다음날로 곧장 낙동강전투에 참전했답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북녘으로 후퇴하여 줄곧 북한에서 살았답니다. 의용군 입대 후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눈시울을 적시더군요. 그때의 당신 체험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들을 피를 토하듯 시로 쏟아 당신을 계관시인으로 만들었나 봅니다."
"아마도 남쪽 북쪽 가리지 않고 그렇게 의용군으로 입대한 이들이 많을 겁니다. 한 모임에서 이곳 버지니아 주 센터빌에 사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 막내아들 심재호 씨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당신 큰형도, 큰집, 작은집 사촌형들도 충남 당진 송악 부곡동에서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한 무더기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채 의용군에 나간 뒤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답니다.""제 외가는 경북 금릉군의 한 시골인데 그 마을의 한 아저씨는 한국전쟁 때 양쪽 군대로 참전했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갑자기 인민군 세상이 되자 그들의 선동에 인민의용군으로 나갔다더군요. 곧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할 때 탈출하여 당신 집 다락방에 내내 숨어 지내다가 지서 순경에 붙잡혀 그 부모가 땅 몇 마지기 돈을 지서 주임에게 뇌물로 바친 뒤 다시 국군에 입대시켰다고 하더군요.""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더러 있었을 겁니다. 배우 최은희 씨도 한국전쟁 때 양쪽으로 끌려 다니며 선무공작을 하였다는데, 때로는 총구 앞에 어쩔 수 없이 치마를 벗었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전쟁 후에도 납북되었다가 탈출하는 등, 당신 자신이 한 편의 영화 같은 영욕의 삶을 살았지요. 분단국가의 한 유명 여배우가 겪은 기구한 인생유전이라고 할까.""그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느 노시인은 '살아남은 자는 다 죄인이다'고 그 시대의 아픔을 말씀하시더군요. 제 아버님도 '양심적이고 똑똑한 사람은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거의 다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늘 말씀하셨지요.""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랄까, 혼돈의 시대, 회색의 시대였지요."김준기 아저씨"어떤 집에는 맏아들은 국군에, 둘째 아들은 인민의용군에 입대하여 부모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했답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대부분 젊은이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같은 전쟁터에 내몰렸습니다.""그래도 남자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하면 훈장을 받거나 연금도 타고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여자들의 삶은 아주 비참했지요. 총구 앞에서 억지로 능욕을 당하거나, 늙은 부모와 어린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치마를 벗지 않을 수도 없었답니다.""게오르규의 '25시'에서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요.""루마니아인 요한 모리츠라는 예쁜 부인을 둔 탓으로 유대인으로 몰려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독일군인이 되어 독일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고, 13년 만에 귀국하자 그의 아내 곁에는 알지 못하는 어린애가 서 있는 그런 이야기지요.""아무튼 전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자비하고 비참한 거지요. 사람을 많이 죽여야 영웅이 되는 거니까…."고동우가 추려서 건네준 한국전쟁 사진 가운데 쓸만한 것을 골라 스캔작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줄곧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에 본 김준기 아저씨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김준기 아저씨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북한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내려와 다부동전투 중에 부대를 탈출하였다가 유엔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로 석방되었다. 그 길로 곧장 국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뒤 이곳저곳 흘러 다니다 구미가축병원 조수로 주저앉았다. 상구미 방천 밑에서 점방을 하였던 큰고모는 앞집 가축병원의 김준기 아저씨를 늘 가엽게 여겼다.
"우야겠노. 가축병원 김 조수는 남쪽에 피붙이 한 사람 없이 혼자 산다 아이가. 부모가 얼매나 보고 싶겠노. 아이고 불쌍해라."
가축병원 조수 준기 아저씨는 자그마한 체구에 왕방울 같은 두 눈을 껌벅이며 말없이 일만 했다.
"기리지 말라우" "이 보라우.""메라구.""일없습네다."준기 아저씨는 이런 억센 평안도 말을 자주 썼다. 우리는 이따금 그 말씨를 따라 하거나 흉내 내기도 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준기 아저씨가 한 여인 때문에 남쪽에 남았다는 얘기를 귀엣말로 몰래 소곤거렸다.
그런데 김준기 아저씨는 마침내 그 여인을 만났을까?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나는 그런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왔다. 그 뒤로 김준기 아저씨의 후문을 전혀 듣지 못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