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2013년 현재 국가정보원의 '원훈(院訓)'이다. 중앙정보부·안기부 당시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이 국정원 개칭 이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이후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변했다.
그러나 이 원훈은 오늘날 무색하기 짝이 없다. 국정원은 24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 의혹이 제기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일방적으로 공개했다. 국정원은 검찰 수사로 드러난 불법 정치·선거개입 사건에 이어 일명, 'NLL 대화록'까지 이날 공개하면서 '무명'이 아닌 명실상부한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여야는 모두 '조연'이 돼 버렸다. 국정원은 직접 8쪽 분량의 발췌본과 100쪽 분량의 대화록 사본을 들고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실을 방문했다. 여의도가 나흘째 'NLL대화록'의 성격과 공개 여부를 놓고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직접 나서 '폭탄'을 떨어트리고 간 셈이었다.
새누리당은 이를 수령했고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8쪽 분량의 발췌본은 즉각 각 언론사에 입수돼 관련 전문이 공개됐다. 민주당은 긴급 최고위를 거쳐 남재준 국정원장 등 관련자에 대한 법적대응을 천명하고, 관련 상임위를 통해 이 문제를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 '국정원 해체'도 주장했다. 지난 20일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 등 새누리당 소속 정보위원들의 'NLL대화록' 단독열람에 대한 대응보다 한층 더 수위가 높아졌다.
"긁어서 부스럼 만들 꼴"이었다. 사실 민주당은 '선(先) 국정원 국정조사-후(後) 대화록 공개'를 제안한 상태였다. 국정원에 보관돼 있는 사본이 아닌, 국가기록관에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보관된 원본을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공개하자고도 했다. 국정원이 굳이 나서서 논란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국정조사 '물타기'인가, '자기보호본능' 발동인가
"쿠데타에 준하는 항명"이라는 야권의 비판이 즉각 제기됐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사건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서한에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국정원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여야가 제기한 국정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정원을 지시·감독하는 대통령이 국정원의 불법 정치·선거개입 사건 국정조사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공교롭게도 국정원은 이 발언이 보도된 직후 'NLL대화록'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말을 아끼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우리는 오늘 현재 아무런 입장이 없다"며 "청와대가 허락할 문제가 아니고 국정원의 일이라는 기존 입장 그대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국정원이 불법으로 불법을 덮으려고 한다"며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청와대의 지시나 허락없이 했을까, 그렇다면 (남재준) 국정원장은 해임감"이라고 지적했다. 또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의 국정조사를 피하려고 국익을 내팽개치는 박근혜 정부의 모습이 참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국정원선거개입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인 신경민 최고위원도 "도대체 국정원 댓글사건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국정조사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NLL대화록' 공개 결정이 국정원 단독으로 이뤄졌든, 청와대·새누리당의 지시를 받았든 국정원 불법 정치·선거개입 사건을 물타기하려는 시도란 얘기다.
신 최고위원은 또 "만약 국정원이 어쩔 수 없는 지시에 의해 공개했다면 이명박 국정원과 박근혜 국정원은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국정원은 완전히 새로 거듭 태어나든지 해체하든지 선택해야 한다"며 '국정원 해체'를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 법률위원장인 박범계 의원은 국정원의 '자기보호본능'이 발동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남재준 국정원장 등을 특수기록물 유출 혐의 등으로 추가 고발하려는 민주당의 방침을 접한 것이 대화록 공개의 결정적 계기라 본다"고 말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의 대화록 사본을 공공기록물로 해석하더라도, 국정원은 관련법상 '통일·외교·안보·수사·정보 분야의 기록물을 생산하는 공공기관'인 '특수기록관'에 해당된다. 결국 남 원장은 열람조차 허락되지 않는 특수기록물을 여당 정보위원들에게만 제공한 셈이다.
계산 복잡해진 새누리당 "전문 공개는 민주당과 함께 하려고..."
대화록 공개를 거듭 촉구했던 새누리당은 역설적으로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남재준 국정원장의 고심어린 결단"(김태흠 원내대변인)이라며 환영했지만 전문 공개는 "민주당과 함께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최경환 원내대표)이라며 보류했다.
대화록 공개에 따른 여론의 변화 추이를 지켜보기로 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대화록 기밀해제를 합법적이라고 두둔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일호 대변인은 이날 황우여 대표 주재로 열린 긴급 최고위원회의 직후 브리핑을 통해 "(대화록 내용에) 경악을 금할 수 없고 과거 민주당과 일부 야권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공개를 거부했는지 짐작이 간다"며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호국영령과 나라를 지키는 국군장병에게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이 지난 20일 대화록을 단독열람한 뒤, '굴욕감' '굴종' '배신'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노 전 대통령의 'NLL포기발언' 의혹을 기정사실화했던 것과 같은 취지였다.
그러나 "발췌본 내용 중 어디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냐" "대화록 공개를 계속 촉구해놓고 지금은 공개하지 않나"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그에게 쏟아졌다. 유 대변인은 "NLL 영토문제라든가, BDA (제제) 문제를 막았다든가, NLL 영토선에 대해 여러가지 시사할 수 있는 관련 발언"이라고 두루뭉수리하게 답했다가 "호국영령께 부끄러운 내용이 뭐냐"는 거듭된 질문에 "서해 평화협력지대로 NLL 치유한다고 한 건 아무리 해석해도 무력화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앞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이 대화록 단독열람 후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한테 '보고 드린다'고 했다고 말한 부분도 확인했느냐"는 질문에는 "제가 다시 확인해야겠지만 그런 표현은 못 본 것 같다"고 발을 뺐다.
대화록 발췌본이 공개되면서 예상됐던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 셈이다. 실제로 누리꾼들의 반응도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다. 새누리당처럼 "사실상 NLL 포기 발언"이라는 반응도 있지만 "도대체 어디에 '포기'란 발언이 있느냐"는 반론도 빗발치고 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해 평화협력지대' 구상을 'NLL포기'로 본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DMZ 내 세계평화공원 설치' 발언도 '휴전선 무력화'로 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 "DMZ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지역이 됐다, 남북한 만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풀어야 하고 이제 DMZ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진정한 비무장지대가 돼야 한다"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유지하면서 DMZ 내에 세계 평화공원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까지 요구했던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정공법 택했다"는 국정원, 실은 '단독열람' 서상기 구했다?
이를 두고 국정원이 6월 국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NLL대화록'을 정치권에 떠넘겨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털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대화록의 해석을 두고 여야 모두 유불리를 따질 수 없는 상황인만큼 국정원 입장에서 차라리 공개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국정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여야 공히 전문공개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대화록 공개 이유를 밝혔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지금 우리가 (대화록을) 계속 가지고 있어봐야 논란만 더 확산되는 것 아닌가"라며 "국정원에서는 여야를 떠나서,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그것을 가지고 있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해 대선 때는 (대화록을 공개할 경우) 후폭풍이 심하고 선거에 휘말릴 가능성이 많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정쟁의 대상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라며 "(대화록 공개는) 정략적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원칙에 따라 정공법으로 나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지난 20일 있었던 대화록 '단독' 열람 후폭풍을 수습하기 위해 공개를 강행했다는 해석도 있다.
앞서 민주당은 발췌본을 열람한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을 비롯한 새누리당 정보위원 5명과 열람을 허가한 남재준 국정원장·한기범 국정원 1차장을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국정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주장대로 대화록을 '공공기록물'로 보더라도 적법하다는 판단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공기록물관리법상 비공개기록물은 열람신청서에 적은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즉, 외부 공표 등의 행위는 할 수 없는 셈이다. 처벌 규정도 강하다. 비밀 기록물을 열람한 이가 그 비밀을 누설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고 '목적 외 용도'로 사용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그러나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은 열람 직후 브리핑을 열고 사실상 열람 내용을 '누설'했다. 서상기 정보위원장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면서도 "핵무기가 관련되는 부분도 있고, 군사력 관련 부분도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일부 보수언론에는 다음날 '새누리당 발(發)'로 구체적인 발췌본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이 사건을 공안1부에 배당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국정원이 대화록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하고 정치권에 전격 공개하면서 이 같은 고발 '전제'는 흔들리게 됐다. 고발 당시에는 위법한 행위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열람에 제한이 없는 일반문서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설사 사법당국이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의 기밀 누설 행위 당시의 법을 적용, 처벌하려 하더라도 처벌의 수위 등을 놓고 (일반문서로 재분류된) 현재 상황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날 "남재준 국정원장이 청와대까지 설득하며 NLL대화록 문제를 주도했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그런데 (자기 때문에) 서상기 위원장 등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이 위기에 처하자 수사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대화록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