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에서는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팔았으나 황후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녀가 주인공이다. 효녀 심청이 얘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였을까? 관음사에는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됨직한 사료가 있다. 근원설화란 문학작품의 모체가 된 설화를 말한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에 가면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서기 301년에 성덕보살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는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서기 384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다. 1374년(공민왕 23년)까지 다섯 차례 중건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원통전만 남고 전소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원통전(국보 273호)과 금동관음보살좌상(국보 214호)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원통전은1954년 인근 대은암을 옮겨와 중건하였으며 국내 유일의 어람관음불상과 불두만 남은 소조관음불상이 있다.
무량수전과 원통전 앞마당에는 석조 조각상이 있다. 왼손엔 물고기, 오른손엔 낚싯대로 추정되는 '지물'을 들었다. 절에서는 이를 '어람관음불상'이라고 부른다. 법화경에서 어람관음은 33관음의 하나로 물고기로 가득 찬 어람(물고기 바구니)을 들거나 혹은 물고기를 타고 있으며 용이 해치거나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관음사는 한국전쟁 당시 곡성군내에 있는 10개의 면과 화순군의 4개면, 담양군, 승주군내에도 논밭을 소유한 대지주로 합쳐서 1만6000마지기에 달했다. 소작인도 5천명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화엄사 등은 전후에 유명해진 사찰이며 당시는 관음사 영험 사실이 알려져 사월초파일 등에는 계곡 옆으로 참례하는 사람들과 우마가 끊이지 않고 왕래했을 만큼 큰 사찰이었다.
관음사연기설화는 심청에 대한 개연성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관음사에는 사찰의 내력이 적힌 <관음사사적>이 있다. <관음사사적>에 전하는 연기설화를 보면 장님 아버지를 둔 효녀 원홍장이 홍법사의 불사를 위하여 '성공'스님에게 시주되고 스님을 따라 나섰다가 중국 진나라의 사신을 만나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고국을 못 잊어하며 불탑과 불상을 만들어 보냈고, 황후가 보낸 금동관음보살상을 옥과 처녀 성덕이 발견해 모신 곳이 관음사이다.
곡성이 심청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관음사연기설화에서 중국 측 사신이 섬진강 하류인 승주 낙안포에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섬진강 유역 어느 지역에 양질의 그리고 대규모의 철산이 존재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만약 그곳이 심청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곡성군 대흥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관음사연기설화의 개연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에는 '쇠쟁이'라는 마을이 있다. 쇠쟁이라는 뜻은 쇠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필자의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고 어릴적 나무하고 꼴 베러 다니던 곳이다.
그곳은 섬진강가에서 5백미터 쯤 떨어져 있어 중국과 거래가 이루어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당시 바닷길이 위험해 인신공희(옛날의 제사에서 공양의 희생물로 인간을 신에게 바친 일이며 인신공양이라고도 불린다) 제도가 있어 개연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쇠락한 관음사 모습이 안타깝지만 효사상의 근원이라는 곳에 위안 받아
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절을 이용하자 국군 21연대가 들어와 절을 불태웠다. 당시 관음상도 불에 타 녹아 버려서 머리의 한쪽 편만이 남아있다. 남아 있는 소조관음불상은 안면의 미소가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스님이 80명 이상 거주하고 10여 면에 걸쳐 대지주였던 관음사는 현재 몇 채의 건물만 남아 있어 옛 영화를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곡성군에서 효녀 심청을 기려 매년 10월 초순경에 곡성심청축제를 개최한다. 곡성심청축제는 심청이 실천했던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효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관음사의 쇠락과 효사상이 사라져 감을 안타까워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덧붙이는 글 | 다음블로그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