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논란의 중심에 선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게는 36년간의 군 생활 내내 '전형적 군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그에게 '생도 3학년' '선비' '천연기념물' 같은 별명이 붙은 것도 육사 생도 시절부터 까다로울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다는 이유에서다. 지휘관 시절 부대 관사로 찾아 온 부인의 식대를 받게 했다든가, 회식 자리에서 마무리로 <애국가>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지난 3월 18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철두철미하게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융통성 없는 군인으로서의 태도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며 때로는 유연해야 할 국정원장의 임무와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내비쳤다. 하지만 과거 남 원장이 4·3 사건을 '무장폭동', 전교조를 '친북좌파세력'으로 지칭한 강연 자료에 대한 추궁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남 원장의 국정원이 정치·선거 개입으로 얼룩졌던 전임 원세훈 원장의 과오는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당시 청문회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남 원장에 대한 이런 기대는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회의록을 공개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원칙은 한번 무너지면 되돌리지 못한다, 융통성이 없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했던 남 원장은 실정법을 위반하고 대통령 기록물을 공개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나아가 대화록 공개가 국정원의 명백한 정치관여 행위와 국기문란을 입증한 것이란 지적까지 받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인 김현 의원(민주당)은 "개인적으로 남 원장이 인사청문회 때 보여줬던 태도에 대해 신뢰를 보냈었다, 남 원장이 원세훈 원장 시절 빚어졌던 불법 선거 개입 부분을 근절하고 거듭날 수 있도록 국정원 개혁의 과제를 국민들 앞에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무색하게 됐다"며 "오히려 원세훈 원장은 회의록 공개라는 불법 행위를 적어도 본인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 원장은 그보다 더 퇴행돼 있다는 점이 심각하다"고 비판했다.
회의록 공개의 배경에 대해 지난 6월 28일 국정원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포기한 것으로 국정원이 판단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혀 "남 원장이 NLL 무력화와 영토주권 포기 발언록을 보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공개하게 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뒷받침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보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판단한 주체가 남 원장 개인이 아니라 국정원 차원의 판단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정원장 개인의 판단이냐 아니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국정원, 정치적 판단 내리는 기관 아니다"남 원장은 스스로도 이미 "야당의 공격과 왜곡으로부터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대화록 공개를 박 대통령과 사전에 상의했는지 여부에 대해 자신의 단독 행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 원장의 이런 인식 자체가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나온 것이란 비판도 거세다.
즉 비밀정보를 수집·분석·생산하고 이를 지키는 것이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인데, '기관의 명예'나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대화록을 공개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국가정보기관 전문가인 문정인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는 "국정원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거나 정책을 수립·집행·홍보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대통령에게 건의는 할 수 있어도, 전적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라고 지적했다.
또 국정원이 대화록 공개의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자의적 해석을 근거로 외교관례를 파기했다는 점에서 '국익을 팔아먹은 쿠데타'라는 질타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제안한 서해 공동어로구역을 노 전 대통령이 받아들였으며, 이럴 경우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의 우리 군이 모두 철수해야 할 지경이었고 북한이 서해 공동어로구역을 잠수정 등을 이용한 침투 목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국정원의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결론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방전문가는 "1990년대부터 계속 얘기돼왔고,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도 거론돼온 서해 공동어로구역을 김정일 위원장이 2007년 정상회담에서 제안했다고 하는 것은 이전 논의를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해 5도의 우리 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공동어로구역이 만들어질 경우 남북의 군함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일 뿐, 서해5도의 우리 군이 철수한다는 이야기가 아닌데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다"며 "실제로 국정원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남재준, 조직 보호 위해 총대 메고 나섰나
그렇다면 남 원장은 왜 이런 역풍을 무릅쓰고 대화록 공개라는 무리수를 뒀을까.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시각은 지난 해 대선정국에서 댓글 공작으로 불거진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검찰 수사를 거쳐 국정조사까지 논의될 만큼 사안이 확대되자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남 원장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대화록 공개가 남 원장 개인 성격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대화록을 공개하기 전에 청와대와의 사전교감 내지 조율이 있었다고 보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대화록을 공개하는 데 남 원장 개인의 의지가 더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시각이다.
남 원장은 참여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면서 '군 사법 개혁' '국방부 문민화' '주적 개념 철폐' 등의 문제로 노무현 청와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특히 2004년 11월 터진 군 진급 심사 비리 사건 당시에는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군 검찰 수사에서 남 원장이 연루됐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자 청와대는 전역지원서를 반려했고, 그는 2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 4월 전역했다.
계룡대에서 열린 고별 강연에서 그는 "여러분은 전사(戰士)다, 본인의 가치관과 소속 조직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며 "군인은 죽어야 할 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조국, 내가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라고 말했다.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위험한 인물"
남 원장의 '전사론'은 국정원장 취임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지난 3월 22일 국정원장에 취임하면서 남 원장은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며 "여러분도 전사로서의 각오를 다져달라, 여러분의 사기와 복리 증진을 위해 후방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짤막한 말로 취임사를 마쳤다.
사실 '냉전의 전사'인 그를 국정원장에 앉힐 때부터 "국정원이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남 원장에 대한 한 안보 전문가의 평가는 이런 우려를 잘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한 사람을 들라면 누가 뭐래도 난 남재준 국정원장을 꼽겠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 온 남 원장은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것이 체화된 사람인데, 그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냐, 아니냐'의 지극히 이분법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남 원장은 "나도 정치 중립을 지킬 테니 정치권도 지켜 달라"고 여야의원들에게 당부했지만, 대화록을 공개함으로써 남 원장 스스로가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리고 그 부담은 이제 정치권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될 몫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