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폭염과 함께하는 7월. 굳이 와달라고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지난달부터 더위는 어찌나 사람을 들들 볶는지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진 기분이다. 거기다 조금 선선할까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창밖을 적시고 있는 빗방울까지. 정말이지 밖으로 돌아다니기엔 부담스러운 날씨만 이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녹초가 되어버린 육신과 정신 모두에 한 번쯤 기분전환이 필요한 시점 또한 지금이다. 그래서 서울 청담동에 있는 미술관 송은 아트스페이스를 찾았다.
유리케이스 안에 전시된 형형색색의 도자기들이 꼭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이곳. 입구 근처에 놓인 화사한 도자기가 흡사 유럽 최초의 도자기인 마이센 자기(Meissener Porzellan)를 빼닮은 반면 그 반대편을 메우고 있는 도자기들의 청아한 문양은 우리나라의 청화백자(靑華白磁)를 꼭 닮았다. 그런데 그 중 몇몇 접시에 새겨진 문양 아랫부분이 흡사 물감을 중간에 흘려보낸 듯 흘러내린다. 일부러 이렇게 그린 것일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려는 순간 안내를 맡은 도슨트님이 의외의 한 마디를 던진다.
"도자기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머리카락으로 그려졌어요."
지금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진행 중인 전시는 작가 이세경의 개인전 '레콜렉션(Recollection)'. 8월 10일까지 진행되는 전시이다. 도예를 전공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왜 하필 머리카락이었을까?
그에 따르면 머리카락이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있다. 머리카락이 우리 몸에 붙어 있을 때는 하나의 신체기관을 넘어 애지중지 가꾸고 장식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번 빠져버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저분하고 청결하지 못한 대상이 된다. 왕자님이 하루아침에 거지로 뒤바뀐 셈이다.
바로 이 아이러니한 특징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시도는 이 거지를 다시 한번 왕자님으로 되돌려놓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극적인 드라마의 무대로 도자기를 선택했다. 버려진 머리카락이 순백의 자기 그릇 위를 물들인 문양으로 환생한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받은 감정은 충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얼떨떨한 감정을 안고 향한 다음 층에서는 벽에 걸려 있는 도자기들을 만났다. 아래층의 도자기들이 전통적인 도자기에 머리카락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라면 이 층에 있는 작품들은 도자기라기보다는 도자기로 만든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것에 가까워 보였다. 머리카락이라는 재료에 초점을 맞췄던 아래 층 도자기들과 달리 이곳의 도자기는 거기에 그려진 문양 자체를 통해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이 층의 작품 중에는 독일 마이센 자기의 대표적 문양인 츠비벨무스터(Zwiebel Muster)와 동양 도자기의 전통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양파처럼 생긴 꽃을 뜻하는 츠비벨무스터 문양은 사실 중국 명나라 도자기의 연꽃이나 국화, 석류 문양 등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란다. 독일에는 연꽃이 없기 때문에 저런 이름이 붙었다고. 그래서 둘은 서로 하나인 듯 구분이 쉽지 않다.
또한 세계 각국 전통 공예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이곳의 다른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면 생각은 좀 더 깊어진다. 분명히 각기 다른 곳에서 온 문양이건만 한 곳에 모아놓으니 문양의 이어짐이 마치 경계가 없는 듯 흐른다. 이것은 어찌된 일일까? 명확한 답을 내기가 어렵다. 다만 이세경에게 머리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과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다를 것이 없듯 그 앞에서 어느 곳의 문양도 단지 하나의 문양으로서 도자기에 그려질 뿐이다.
한편 옆방에서는 검붉은 카펫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페르시아 융단을 닮은 이 카펫 역시 머리카락으로 문양을 수놓은 작품이다. 그런데 앞선 도자기에 머리카락으로 그려진 문양이 물감으로 그린 듯 유려한 곡선을 가졌었다면 이 카펫의 질감은 오돌토돌한 것이 지금까지 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작품이 직모라면 이 작품은 곱슬머리랄까?
설명을 청해 물으니 다른 작품들이 염색한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가며 접착한 반면 이 작품은 잘게 자른 머리카락을 접착하지 않고 뿌려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질감도 완전히 다르게 나온 것이다. 또한 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그만 바람이나 충격에도 문양이 흐트러진 흔적이 남는다고 한다. 흥미가 동해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보니 과연 그 말대로 머리카락이 흩날린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다 유동적인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시장 마지막 층에서 색다른 작품과 마주쳤다. 한 인도 여성의 머리카락이 금발에서 흑발이 되어가는 과정을 표현한 네 점의 사진. 사실 이 여성의 금발 머리카락은 유럽에서 사용하는 인모 가발이다. 그런데 이 가발은 인도 여성들이 사원에서 무사안녕을 염원하며 바친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것이 다시 인도 여성에게 씌워진 모습을 보니 살짝 기분이 묘하다. 하나의 가발에 얽힌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인 사연들. 소원을 담은 머리카락은 가발이 되고 그 가발은 다시 작품이 되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 반대편에서는 이세경 작가의 새로운 프로젝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레콜렉션(Recollection)' 프로젝트는 참가자들의 사진이나 이야기 등을 그들의 머리카락과 함께 받아서 머리카락 그림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요즘처럼 사진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머리카락으로 추억을 간직하고는 했다는데 이렇게 추억이 보존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낭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담을 하나 첨언한다면 작가님께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실 때 참가자 분들 중에는 가끔 제공한 머리카락에 비해 아주 대작을 요구하는 분들이 계서서 왕왕 낭패를 겪기도 하셨다고.
천천히 한 시간 남짓 관람을 마치고 머릿속이 온통 머리카락 범벅이 되었음을 느낀다. 그저 신기함에서 출발해서 최종적으로는 사람에 관해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에 미술은 재미있다. 가끔은 이렇게 변화의 지점에 서서 자신의 생각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미술관은 언제나 시원하니까. 관람료 무료에 친절한 작품 설명은 덤이다.
덧붙이는 글 | 휴관일 : 매주 일요일
관람시간 : 11:00 -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