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 9297km를 약 7일 동안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중간 중간 서는 크고 작은 역에서 내려 다음 기차를 타거나 다른 노선으로 환승을 할 수도 있다. S와 나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며칠 쉬었다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지 중 하나인 바이칼 호수와 올혼 섬에 가기에 훌륭한 베이스캠프일 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중심으로 도시 자체도 역사가 깊고 흥미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는 흔히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다. 이는 유형을 와 도시를 일군 데카브리스트들의 역할이 크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당원'이란 뜻으로,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 혁명을 거행한 청년장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보다 몇 해 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프랑스군을 파리까지 추격해 갔던 청년장교들은 그곳에서 프랑스 혁명 직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서유럽을 경험했다. 그리고 아직 전근대적인 러시아를 개혁하고자 차르 대신 입헌군주제의 성립과 농노제 폐지 등을 외쳤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끝나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100명 이상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들 데카브리스트 중 하나인 발콘스키가 살았던 저택이자 지금은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된 곳을 방문해보았다. 열대식물이 자라는 온실과 유명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맞았다는 응접실의 장식이 인상 깊었다. 그럼에도 유배 온 데카브리스트들과 그 부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형에 모스크바의 생활을 그리며 우울증에 빠졌다고 하니 당시 러시아의 상류층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누렸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물관 전시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그들을 따라온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의 사연으로 이뤄져있었다. 하루아침에 전도유망한 청년장교의 부인에서 반역자의 부인이 된 그들은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모든 걸 포기하고 맨손으로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든지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남편의 사상을 지지하며, 사랑과 고난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정말 '악처'일까
발콘스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톨스토이의 삼촌이며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기차를 타고 오면서 봤던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떠올랐다. 지고지순한 데카브리스트 부인들과 대비되는 톨스토이의 '악처' 소피아 때문이다.
부유한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톨스토이가 말년에 자신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했으나 아내의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그들의 갈등과 그 갈등 끝에 톨스토이가 가출해 한 시골 기차역에서 객사하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소피아는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으로 톨스토이가 글을 쓰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조언을 해주고, 악필 톨스토이를 대신해 정서를 하는 등 그의 저작 활동을 도왔다. 그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 안의 크고 작은 문제와 열세 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양육을 도맡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톨스토이는 나라를 대표하는 공적 인물이 되고 톨스토이보다 더 톨스토이주의적인 그의 신봉자들이 가족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못 견뎌하는 소피아는 질투 많고 욕심 많은 아녀자로 몰린다.
하지만 소피아의 입장은 다르다.
"그(톨스토이)는 진정한 온정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람이에요. 그의 친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조에서 나온 거예요. 그의 전기에는 그가 물통을 나르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겠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는 지금까지 서른 두 해를 같이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물 한 모금 먹이거나, 아이들의 잠자리를 단 5분이라도 보살펴 온갖 일에 시달리는 나에게 잠시라도 쉴 틈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예요." - <느낌이 있는 이야기>, 프랭크 미할릭 엮음, 바오로딸.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을 직접 보지도 못한 내가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톨스토이와 소피아가 심하게 다투다 갑자기 그때 생각 나냐며, 닭소리를 흉내 내는 모습이었다. 백발의 쭈글쭈글한 두 노인이, 게다가 그 중 하나는 온 국민에게 칭송받는 위대한 사상가이기까지 한 사람이, 품위에 개의치 않고 우스꽝스런 소리를 내며 팔짝팔짝 뛰는 것.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서로 껴안고 잠드는 것. 그것이 각자에게 서로의, 관계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한다.
문제는 그들의 이런 개인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외부인이 사회적 관점으로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는 소피아를 악처로 모는 것이다. 여자가 직업을 가진다거나 재산을 가지기 어려웠던 시절, 톨스토이의 재산은 아내와 자식을 위한 공동 재산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당연한 권리를 지켜내고 아내로서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하찮고 비난받을 행동인지 묻고 싶다.
자신의 세계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은 'S'
S는 내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서양 남자들에 대해 품어왔던, 니것 내것 구분이 확실한 차가운 사람일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자신의 소유물, 시간, 추억과 미래계획, 콤플렉스까지 모든 것을 공유했다. 출근을 하고 나서도 혼자 남아 있을 나를 위해 매일 점심시간에 30분 거리를 운전해 집에 들러 요리를 해주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따라 독일에서 정착할 때를 대비해 독일에서의 내 커리어와 나만의 생활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싸울 때만은 너무나 달라졌다. 자신은 자유인으로 내가 아무리 애써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툼이란 게 누구의 일방적 잘못이 아니라면 어떤 이론이나 행동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일 테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은 옳고 바뀔 의향이 없다고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다툼을 진행하는 것은 그를 상처 입히고 패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나 사상 뒤에 숨은 뜻을 알고 싶어서였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에게 그렇게 이해받고 싶었다. 이런 모든 사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건설적 논의도 차단한 채 "나는 이런 사람이니깐, 싫으면 떠나든지"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커다란 벽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차근차근 말해도 그가 듣지 않으면 감정은 격해지기 마련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논쟁하는 것도 버거웠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을 한다거나 고함을 지르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거기까지 오게 된 과정은 무시한 채 내가 가만히 있다 그러는 것처럼 나를 히스테리 환자로 몰았다.
나는 히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성차별적이라고 느낀다. '자궁'이라는 어원을 가진 이 말은 남성들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여성들에게 일괄적으로 붙이곤 했던 병명이다. 자궁에 이상이 생겨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히스테리와 자궁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 밝혀진 사실이다. 거기다 감정적 행동은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유일하게 자신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항상 이성을 유지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는 것일까.
남성은 사랑에 있어서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예술 속 사랑과 죽음을 연구한 김동규는 <멜랑콜리 미학>에서 서양 남성의 자기 사랑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남성적 사랑에 뿌리내린 자유는 복종을 금기시한다. 복종은 자유의 반대이고 자유의 적대자이자 자유의 포기이며, 치욕이고 굴종이다. 복종하는 것은 노예의 증표인 반면, 복종시키는 것이 자유인의 표지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연인을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남성적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은 위험천만하고 미친 짓이다.이 근거에는 타인보다도 소중한 '나'가 있는데 김동규는 근대 서양의 이런 '나' 강조도 허상이라고 한다.
불교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는 무아론이다. '나'는 가상이고 환상이며 덧없는 그림자다. 영겁의 회귀 속에 잠시 머무는 자리가 '나'라는 환상의 자리다. (중략) 사회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타인 또는 사회의 시선이 '나'를 형성한다고 보고 있으며, 유전학자들에 따르면 '나'는 단지 유전인자들의 운반 도구일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와 칸트로 대변되는 근대 서구인들처럼 지나치게 '나'에 집착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사랑은 모든 게 뒤바뀌는 경험이다. 자신과 다른 또 하나의 소우주를 만나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맞춰나가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그가 편한 시간에 맞춰 그를 만나러 유럽에 가면서도, 싸울 때마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를 대신해 매번 먼저 사과하면서도,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하면서도 나는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S는 자신의 세계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은 함께 해야 하는 것... 이제 '마법'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우리를 이별에 이르게 한 그의 러시아 여행 거부도 이의 연장이었다. 우리는 이 여행으로 한국에 간 뒤 앞으로 함께 정착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고, 그곳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비정상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고 한국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자신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고 확신했다. 반면 나는 어리고 사회생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여자인데다 서양에 뒤처진 동양에서 왔기 때문에 서양에 적응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는 거였다.
그가 한국이 낯선 만큼 나도 유럽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가 더 우수해 나만 그의 세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편견이었다. 기존 관념의 변화를 겁내고 기존 라이프스타일의 희생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수동적인 모습도 실망적이었다. 그는 그럼으로써 자신이 주체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나'라는 감옥에 갇혀 더 부자유스러웠던 건 오히려 그였다.
나는 S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국적 차이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거란 걸 알았고, 그것을 다 극복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S 스스로가 현실이라는 한계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리고 사랑에 미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사랑은 두 사람이서 함께 해야만 의미 있는 것일 테였다. 진짜 미친 사람이 될 수는 없었기에 나도 사랑의 마법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