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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먹기 체험을 했어요. 그거 먹어도 실제론 배가 고팠어요. 그 조그만 쌀뭉치만 먹고도 어떻게 버텼을까요? 열사님들의 힘겨운 투쟁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히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광주광역시 월계동 정암초등학교 6학년 3반의 한 학생이 5·18 열사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다. 이반 학생 25명은 지난 6월 5.18 기념재단으로 등기우편을 보냈다. 등기우편 봉투 안에는 학생들이 쓴 편지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편지를 쓰게 된 건 담임인 방주용 교사의 수업 때문이다.

"교사라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날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말이죠."

방 교사의 말이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하 5·18)을 특별하게 교육하고 있었다. 지난 8일, 기자가 찾은 날에도 교실에서는 역사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꽤나 진지해 보였다. 학생들은 방 교사가 준비한 영상자료를 보면서 느낀 점을 노트에 적어내려 갔다. 본 수업이 끝난 후 4명이 한 모둠을 만들어 서로의 소감을 나눴다.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좋다."

"광주가 지켜낸 민주주의, 이제 우리가 지키겠다"

 기자가 학교를 찾은 지난 8일, 역사수업을 듣고 '모둠별 문장 만들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
기자가 학교를 찾은 지난 8일, 역사수업을 듣고 '모둠별 문장 만들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 ⓒ 신원경

 학생들이 모둠별 수업을 하고있는 모습.
학생들이 모둠별 수업을 하고있는 모습. ⓒ 김성희

5월 말, 방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의 역할놀이를 통해 5·18 역사를 교육했다. 학습주제는 '주먹밥, 나눔, 그리고 공동체'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 편집본을 본 후, 학생과 학부모는 각자 맡은 역할과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주먹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와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는 학부모가 맡았고, 시민군과 간호사는 학생이 맡았다.

똑같은 시민군 역할에서도 조금씩 다른 것은 구성원의 직업이었다. 대학생, 택시기사, 회사원, 전직 군인, 고등학생 등 다양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학생, 허리를 다쳐 들것에 실려 가는 학생,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학부모. 한쪽에서는 주먹밥을 만드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손이 분주했다. 주먹밥 위에는 국화문양을 얹어 추모의 뜻을 더했다.

교실 곳곳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각자 맡은 역할에 빠져있었다. 역할놀이는 약 20분간 진행됐다. 역할놀이를 끝내고 학생들은 주먹밥을 나눠먹으며 공동체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은 "앞으로 여러분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이 그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지켜낸 민주주의를 이제는 우리가 꼭 지키도록 하겠다."

학부모들은 "우리조차도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때 일어난 일이라 잊고 살았던 5·18정신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역할놀이를 준비한 방주용 교사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5·18을 기억하게 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보며 5·18을 쉽게 이해해 보길 바랐다는 것이다. 실제 한 남학생은 "책으로 배울 때보다 5·18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육 막바지에 학생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며 열사들을 기리는 편지를 썼다. 그렇게 모인 아이들의 편지는 5·18기념재단으로 보내졌다. 5·18기념재단은 감사의 뜻으로 6학년 3반 아이들에게 노트를 보내왔다.

방 교사는 "아이들에게 뜻 깊은 경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기뻐했다.

아버지가 겪었던 5·18...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역할놀이로 학생들과 특별한 5·18 역사수업을 진행한 방주용 선생님.
역할놀이로 학생들과 특별한 5·18 역사수업을 진행한 방주용 선생님. ⓒ 김성희

방주용 교사가 이런 교육을 준비한 데는 '그의 아버지가 겪은 5·18'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전남대 상대 회장이었다. 5·18 이후 감옥으로 끌려간 그의 아버지는 6개월이 지나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였지만 당시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동료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를 후회하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당시 상태는 위태로웠고, 어머니는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꺼낼 수 없으셨대요. 몇 년간은 시련 속에서 사셨고, 두 분 모두 힘든 시기를 지나오셨죠."

아버지의 삶,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삶, 두 삶을 지키고자 했던 아들의 삶. 아들은 교사가 되었고, 그는 반 아이들에게 5·18이 가진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겨우 명예가 회복되나 싶더니 최근 종편이나 '일베(일간베스트저상소)'에서 5·18을 왜곡·폄훼하는 세태를 보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대한민국 역사교육부터 바뀌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 스스로도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며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방주용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
방주용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 ⓒ 김성희

하교하는 길에 기자와 방주용 교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지 교실 주위를 뱅뱅 돌던 한 학생이 있었다. 6학년 3반 화요일 반장 안휘빈 학생(13)이었다.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5·18 열사들의 죽음과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고 싶다"며 "5·18을 알게 된 후 11살 동생에게도 내가 알고 있는 5·18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말했다.

"아기가 아빠 영정사진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휘빈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역사왜곡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야무지게 말하는 휘빈이의 말이 또렷하게 귓가에 남았다.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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