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일요일 아침. 내가 사는 서울·경기 북부지역엔 새벽 내내 거센 바람이 불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더니 오전 9시 무렵부터 다시 거센 비가 내린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시작된 비가 일주일 내내 내리더니 다시 돌아온 일요일 오전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그간 '그래도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비가 멈추겠지. 그리하여 산행을 할 수 있겠지' 은근 기대했던 터라, 맥이 풀리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비가 시작된 지난 일요일만 해도 초록에 가까운 봉오리 몇 개를 맺었던 '겹왕원추리'가 목요일 오후에 큼직한 꽃 한 송이를 피우더니 그 다음날에도 큼직한 꽃 한 송이를 또 피워 냈다. 거의 매일 거세게 내리는 빗속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크고 화려하게 피워낸 거라 자꾸 눈이 가곤 한다.
꽃을 피우기 쉽지 않은 환경인데도 매일 꽃봉오리를 키워 올려 꽃을 피움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겹왕원추리꽃이 올해는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남이 봐주든 봐주지 않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동이랄까.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내는 강한 생명력에 대한 감동이랄까.
우리 집 마당의 겹왕원추리꽃 뿐이랴. 수많은 꽃들이 거센 비와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꽃을 피우고 그리고 열매를 맺고 있으리라. 지난 5년간 계절 따라 만나던 북한산 S구간의 꽃들도, 또 다른 곳의 꽃들도 말이다. 겹왕원추리꽃에 대한 감동과 비 때문에 산에 가지 못하면서 지난 일요일 산행 때 만났던 S구간의 꽃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산행을 자주하게 되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나무들과 풀꽃(야생화)들을 맘껏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걱정을 가득 안고 산에 오르다 이들 꽃들을 만나고 눈길을 주는 동안 잠시나마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이들의 강한 생명력이 주는 그 감동 덕분에 힘을 얻기도 한다. 야생화들만큼만이라도 어려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요즘 북한산 S구간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은 큰뱀무와 짚신나물, 털중나리, 쥐손이풀, 꿩의다리, 산꿩의다리, 장구채, 석잠풀, 송장풀, 기린초, 노루오줌, 큰까치수염 등이다. 드문드문 갈퀴나물이나 나비나물 등이 보이기도 한다. 조금만 지나면 이 중 일부는 자취를 감추고 사위질빵이나 할미밀망, 꽃며느리밥풀 등과 같은 꽃들이 피리라. 그리고 그 얼마 후 물봉선과 투구꽃, 고마리, 용담, 산부추, 미꾸리낚시 등이 피어나리라. 외에도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질까.
산행 중 만난 꽃들을 혼자만 보기 아까워 활동하는 인터넷카페에 가끔 풀어놓기도 하는데, "그렇게 자주 S구간에 가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꽃들을 어떻게 그리 많이 봤는가?"라며 묻거나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일요일(7월 7일)에는 꿩의다리를 찍고 있는 내 옆을 지나치며 "지리산에는 예쁜 꽃들이 많던데 북한산에는 꽃이 별로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북한산에는 그 어떤 산 못지않게 참으로 많은 꽃들이 핀다. 관심을 두지 않아, 그리고 잘 알지 못해 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간 내가 북한산 S구간에서 만나온 꽃들은 대략 150여종은 넘을 것 같다. 아니 이름을 몰라 그냥 파일로 남겨둔 꽃이나 나무까지 모두 헤아리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 같다. 그럼에도 S구간에 갈 때마다 새로운 꽃들을 만나게 될 정도로 S구간에선 많은 꽃들이 피고 진다.
이 많은 꽃들을 처음부터,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산행을 하면서 알게 된 꽃들이 대부분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산행 중 만나게 된 꽃을 찍어 집으로 돌아와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검색을 통해, 그리고 이런저런 책들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봄에서 가을까지 북한산에서 만난 꽃들의 이름과 특징이 궁금해 도감을 비롯한 이런저런 책들과 인터넷 공간들을 찾아다니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낮에 만난,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꽃을 피우는 식물의 이름을 찾기 위해 수많은 검색들을 시도해보기도 했고 수많은 책들을 뒤진 적도 있다.
무언가를 알고자 이처럼 많은 시간들을 뺏긴 것은 사실 전혀 힘들지도 그리고 속상하지도 않다. 이런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것들을 얻기도 하고,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수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힘든 것은 이른바 야생화 전문가들의 같은 식물에 대한 저마다 다른 동정이다. 전문가들의 저마다 다른 동정 앞에 무엇이 맞나? 헷갈릴 때가 많았다. 지금도 종종 겪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시(詩)를 잘 쓰기 위해 시작한 식물 이름 공부가 이렇게 긴 길을 걸어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자그마치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이어나간 이 공부를 더욱 깊은 식물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목원의 잘못된 팻말과 여러 도감에 나타난 오류였습니다. 그것들이 안겨다 준 많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어려운 식물 용어로 된 이름과 씨름하고, 자생지의 식물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일일이 문헌과 비교하는 일을 계속하다보니 어느덧 전문가라는 소리까지 듣게 됐습니다." -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 여름 가을 편> '저자의 말'에서
이런 내게 우리나라에서 여름과 가을에 피는 야생화 1172종을 조목조목 정리한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 여름·가을>(이비락 펴냄)은 여간 요긴한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참고했던 수많은 도감 중 가장 많은 종류의 야생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다가, 꽃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초보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꽃 색깔별(붉은색, 노랑색, 흰색 등)로 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야생화들마다 전체모습을 기본으로 꽃이나 잎, 열매, 뿌리 등의 기본 사진과 함께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 식물과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사진까지 무려 5천장에 가까운 사진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간 산행 중 만난 꽃이나 나무들을 알고 싶어 관련 책이나 도감들을 참고하다 실망한 적도 많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의 기후가 따뜻해짐에 따라 식물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거나, 오류임이 밝혀졌음에도 그것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옛날의 설명을 당연한 듯 따라하고 있는 경우도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믿음이 가는 것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그 어떤 곳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팻말을 붙여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아쉽고 씁쓸한 우리의 현실을 우려하는 것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들이라면 이 저자가 느낀 '수목원의 잘못된 팻말과 여러 도감에 나타난 오류'의 씁쓸함에 깊이 공감하리라.
"그동안 식물 관련 서적을 180권 이상 사서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발전한 학문적 성과와 변모한 시대적 환경에 맞게 진화한 식물 서적이 나오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오류가 밝혀진 논문도 수없이 나왔건만 그런 것들이 반영된 책이 나오지 못한 채 왜 아직까지도 오류투성이의 두꺼운 도감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각종 논문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부족한 현실, 학문적 성과나 업적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내는 부적절한 논문에 대한 이의제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도 누군가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학연도 지연도 없는 제가 총대를 메기로 했습니다." -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 '저자의 말'에서이 책은 그간의 우리나라 기후 변화에 따른 식물들의 변화와 식물학자들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 우리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식물로 많이 알려진 가시박이나 단풍잎돼지풀과 같은 외래종이나 원예품종이었으나 밖으로 퍼져나가 야생에 적응한 겹왕원추리꽃과 같은 식물까지 소개하는 등 최근 우리의 야생화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고 있다.
뒤늦게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 알려줬음을 알게 되거나, 그리고 내가 인터넷에 올린 것이 잘못된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될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나 개인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오류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런 오류들이 바로잡아지지 않고 되풀이되면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볼 수 있는데다가 접근이 쉽기 때문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 같은 개인공간에 꽃 사진을 많이 올린다. 그런데 아쉽게도 꽃 이름을 잘못 알고 있거나 제멋대로 지어 부르는 등의 오류도 많이 보인다. 인터넷의 전파력은 놀랍다. 나만 보는 공간이 아닌 여러 사람이 보는 공간이라면 꽃 이름 하나, 설명 하나도 최대한 신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참고로 이 책에 앞서 봄에 피는 꽃 648종만을 모아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봄편>이 출간됐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여름 가을에 피는 야생화 1172종)>이동혁 지음 | 이비락 | 2013.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