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대낮부터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셨다. 6월 28일. 첫 월급을 받기로 한 날이자 편집국 전원이 해고된 날이었다.
5월 18일. 당시 난 취재차 광주에 있었다. 자유기고가로 취재는 자유로웠지만, 지갑은 가벼웠다. 주간지, 월간지, 타블로이드, 인터넷 신문사를 전전하며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난 1년 경력의 '삼류기자'였다.
주류 매체 소속이 아닌 언론노동자의 삶은 팍팍하다. 야근수당이나 통신비 지원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다. 짧게는 3개월에서 최대 6개월 동안 '수습기자'란 이름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보도자료 베껴 쓰기를 요구받았다.
아니면 홍보성 기사를 썼다. 임금 삭감 및 체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다. 정론직필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실시간 검색어 창을 띄워놓고, 누리꾼들이 관심 가질 만한 '낚시' 기사를 빨리, 많이 만들어서 쓰는 것, 그것만이 핵심이었다.
"가능성을 보는 거야" 그때 선배가 한 신문사에 자리를 마련해줬다. 신문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실은 건물 입구에 달려있는 작은 간판이 전부였다. 먼지가 쌓인 컴퓨터는 한참이 걸려서야 부팅이 됐다. 화장실은 아래층에 있는 PC방과 함께 썼다. 기존에 나왔던 신문은 재구성한 보도자료와 행사 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이라인이 없거나 오탈자 투성이이거나 하단 기사 일부가 잘려 있기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배는 "언젠가 네게도 후배가 생기잖아. 좋은 신문을 만들자. 그게 역사가 되는 거야"라고 격려해줬다. 발행인은 신문 발전 방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모기업에서 신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과 인건비 등을 댈 것이고, 기자는 신문을 잘 만들면 된다고 했다. 급여도 대졸 신입사원 초봉 수준에 맞쳐 줬다.
6월 초, 분당에 있는 사무실로 옮겨갔다. 사무실엔 열댓 명 정도의 직원들이 있었다. IT관련 회사였다. 사무실 한 켠에 편집국이 마련됐다. 발행인, 편집국장, 편집기자, 취재기자 둘, 모두 다섯 명으로 이뤄진 조촐한 편집국이었다. 분당에서 만난 장태혁 회장(가명)은 자신이 과거 강원도 소재 일간지 사장이었다면서 신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기사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기자들은 좋은 기사를 써내면 되고, 전 월급 안 밀리고 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신문으로 돈 벌기 어렵단 것은 알지만, 제 식구들은 제가 챙기겠습니다."서울 사무실에서 가져온 컴퓨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카메라도 없었다. 장 회장은 자신 소유의 카메라 두 대를 건넸고,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말자고 했다.
"무슨 신문사가 제대로 된 컴퓨터 한 대가 없나!"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기자들은 사무실에 남는 컴퓨터를 떼어다 써야 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기자의 컴퓨터는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장 회장에게 받은 카메라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 신문으로 돈 벌 수 있겠습니까!"장 회장은 기자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술자리에서 장 회장은 자랑을 늘어놨다. 한때 여러 대의 외제차를 소유했고, 골프장도 인수하려 했다고 말했다. 편집국장을 맡은 선배에게는 발행인을 제외하고 새 신문을 만들자고 여러 번 제안하기도 했다.
정신없이 마감을 준비하던 중에 장 회장에게서 호출이 떨어졌다. 그날따라 유달리 흥분해 보였다. 장 회장은 "이 신문으로 수익을 낼 수 있겠냐"고 화를 냈다. "돈만 허비할 일 있나"고도 했다. 첫 번째 신문이 채 나오기도 전이었다. 난 "기자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달라"며 대들었다. 회의는 끝났지만, 결론은 없었다.
'신문 나오기도 전에 편집국 문부터 닫는 건 아닐까.'그날 저녁, 여지없이 장 회장은 기자들을 술자리로 불렀다. 장 회장은 "(기자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6월 중순, 신문이 나왔다. 편집과정은 험난했다. 장 회장이 사준 편집용 중고 컴퓨터는 자주 문제를 일으켰고, 시간은 배로 걸렸다. 종종 오탈자도 있었고, 인쇄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의 질과 편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직원들이 모여앉아 오탈자를 찾고 있었다. 장 회장의 지시였다.
발행인과 장 회장은 자주 이견을 보였다. 장 회장은 격주로 발행되던 신문을 주간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고, 발행인은 광고 수주의 고충을 토로하며 반대했다. 결국 장 회장의 말대로 7월부터 주간 신문 발행이 결정됐다. 마감을 앞두고 야근이 계속됐다. 밤샘보다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월급 걱정, 그보다 더 불안한 것은 불안한 편집국의 앞날이었다.
첫 월급날, 우리는 해고됐다현장 출근 후 사무실로 들어가던 중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무실로 가지 말고 근처 편의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발행인을 제외한 편집국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첫 월급은 미뤄졌다. 6월 28일로 편집국은 정리된다고도 했다. 선배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무실에서 기자들이 짐을 싸는 동안 장 회장은 다른 사무실 직원들을 동원, 책상을 다시 배치했다. 어떤 말도 없었다. 밤새 만든 두 번째 신문이 미처 사무실로 배달되기도 전에 우리는 사무실에서 나와야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 차례 월급날을 미뤄, 장 회장이 월급을 주기로 한 7월 5일. 난 기자 한 명과 함께 사무실을 찾아갔다. 장 회장은 발행인이 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발행인이 도착했을 때 장 회장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출이 안 된다는 은행 측과의 전화통화였다.
"돈이 없다."통화를 끝낸 장 회장이 우리에게 한 첫마디였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가관이었다.
"7월 말까지는 주겠습니다. 언제라고 말할 수 없고, 만약 입금 안 되면 고소해서 받아가십시오."장 회장은 화를 냈다.
"일 잘하고 있는 직원들을 동요시키지 마십시오!"그는 "쪽팔려서 진짜…"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수치스러움과 억울함이 뒤섞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보름이 지났다. 장 회장 회사의 홈페이지에, 일전에 내가 썼던 기사 두 편이 무단으로 게재되어 있었다. 회사에는 나를 비롯해 편집국 전원의 신상정보가 아직 남아 있다.
날개 잃은 기자의 외침기자는 많다. '언론사'라는 이름을 내건 곳도 많다. 한국기자협회나 언론노조에 속한 매체보다 이름뿐인 변방의 언론이 훨씬 많다. 비주류 매체의 기자들은 노조를 조직하는 것도, 사측에 문제제기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매체들의 인식이란 '꼬우면 나가라. 너 말고도 널린 게 기자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거리로 내몰렸다. 일부는 법적대응을 계획하고, 난 기사를 써 억울함을 알렸다. 그간 대꾸도 하지 않던 장 회장은 기사를 보고 수차례 전활 걸었다. 발행인은 이번 달 말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말한다.
임금 체불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문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의 날 움직이게 했던 건 날개 잃은 기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