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꼭 떠나가는 것이 있다. 컴퓨터 모니터에 익숙해진 만큼 책속의 활자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책 속에 숨겨진 보물들을 포기할 수 없기에 마음먹고 책을 읽을 때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아파 오는 눈과 머리에 이내 책장을 덮곤 한다.
그만큼 한번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 옛 것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몸이 멀어진 만큼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꼭 연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도 있듯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추억 때문이리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작은 문화 공간 아뜰리에 플라뇌르에서는 지금 펜화를 그리는 작가들의 모임인 블랙펜의 첫 전시가 진행 중이다. 펜으로 그린 그림, 즉 펜화는 그 기원을 중세에서 찾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형식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손으로 직접 컴퓨터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인 태블릿이 보편화되면서부터 펜화는 조금씩 쇠퇴하였다.
특히 펜화가 주류를 이루던 만화, 삽화 부분에서는 주류가 완전히 디지털 방식으로 넘어간 것이 최근의 일이다. 편하다는 것은 그만큼 빠르게 번져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디지털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의 깨끗한 선을 보고 있으면 이따금 펜화가 떠오른다. 내가 남들이 모르는 펜화의 매력을 알고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예전 기억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탓이다.
지난 20일, 전시 오프닝인 오후 7시를 넘겨 도착하는 바람에 전시장 안에서는 이미 작가 소개가 진행 중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여덟 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소개를 받는 그들의 모습이 아직 앳되다. 많이 잡아도 서른이나 되었을까. 디지털 작업이 익숙한 세대의 펜화 전시라. 낯설기는 하지만 그만큼 기대되기도 한다.
한편 전시 소개 및 작가와의 인터뷰를 맡은 큐레이터 역시 이번 전시가 처음인 모양이다. 다들 작가님들 긴장한 것만 알고 자기가 떨리는 건 몰라준다는 그녀의 애교 섞인 볼멘소리에서 풋풋함이 살짝 묻어난다.
전시는 작가들의 성향에 따라 블랙과 화이트 두 개의 섹션으로 공간을 나누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블랙 섹션의 전시를 감상하기로 했다.
사막 한가운데 놓여 있는 바다와 사람 얼굴에 각종 동물 형상이 뒤엉킨 괴물 그리고 불교 미술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천왕까지. 블랙 섹션 작가들이 그려낸 펜화의 모습은 퍽 광범위했다.
꼭 공포 만화를 보는 듯 괴이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 바로 옆으로는 복잡한 패턴의 문양들을 유려하게 표현해낸 작품이 눈에 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작품들이 정말 같은 펜화가 맞나 싶기도 하다. 대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우연찮게 블랙 섹션 작가 중 한 명인 오경 작가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이 첫 전시라는 그녀는 몹시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중 그녀의 작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펜화를 그리기 이전에는 입시 위주의 미술을 주로 해왔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블랙펜에서 작업을 하면서부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몹시도 부끄러움을 타던 이전과 달리 그녀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맺었는데, 여기서 나는 앞선 내 우문에 대한 현답을 얻을 수 있었다.
블랙 세션의 펜화들이 갖는 특징이 다양함이라면 화이트 섹션 작가들의 작품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아마도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들이 꼭 아름다운 대상을 주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들 작품 중에도 괴물 그림이 있고 뇌와 심장을 그린 작품이 있다. 그러나 잘라낸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선과 그림을 수놓은 문양 하나하나의 섬세함은 인간의 장기를 주제로 한 그림조차도 아름답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화이트 섹션의 작가 중 오인석 작가는 산호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린다. 산호와 소녀, 때로는 소년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꼭 동화를 닮았다. 그는 자신의 작가 노트에 '순수하게 그림으로 살고 싶다'고 적고 있다. 화이트 섹션 작가들의 작품이 가진 섬세한 감정은 어쩌면 자신이 곧 그림이고 싶은 순수한 바람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별로 길지도 않은 관람 시간인데 제법 오랫동안 자기 생각을 하다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멍하다. 이렇게 가끔 미술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때가 있다. 작가 칼릴 지브란은 "기억은 만남의 한 형태이다(Remembrance is a form of meeting)"라고 했다. 자기를 한번 만나고 오는데 걸리는 시간 30분. 아, 관람료 5천 원도 준비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전시일정 : 7월 20일 ~ 26일
관람시간 : 오후 2시 ~ 9시
관람료 :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