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대체 : 31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종로구 계동길에서 만난 자전거로 이끄는 관광용 인력거.
서울 종로구 계동길에서 만난 자전거로 이끄는 관광용 인력거. ⓒ 김종성

인력거(人力車)는 사람의 힘으로 끌어서 움직이는 교통수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에 나타났다가 광복 이후 점차 사라져간 짧은 역사를 가진 수레다. 이름도 모양도 흥미로운 인력거를 실제로 본 건 몇 년 전 중국 베이징의 명소 후퉁(胡同 : 옛 골목)에서였다. 일반적인 교통수단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인력거를 보곤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외국 여행 중에나 만날 법한 인력거를 7월 20일 서울 종로의 계동 골목길에서 마주쳤다. 비와 햇살에 대비해 천정도 달려 있고 시대에 발맞춘 깔끔한 디자인에 '아띠인력거'라는 예쁜 이름도 있다. '아띠'란 말은 친한 친구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란다. 한옥마을, 삼청동, 통의동 등이 있는 서울 종로의 북촌과 서촌, 인사동, 광화문 일대를 다닌다는데, 지난해 7월부터 운행을 하고 있다. 사람의 힘, 정확히는 페달을 돌리는 라이더의 자전거가 앞에서 이끄는 인력거다.

19세기 말의 근대 시절이 연상되는 인력거는 1882년경에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가 한성부판윤(오늘날의 서울 중앙지방 검찰청 지검장과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으로 재직하면서 보급하였다고 한다. 벼슬아치들의 출퇴근에 교자(轎子)라 불리는 가마 대신 인력거를 권장하였다.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인력거 이용은 중지되었고 그 뒤 일본공사관 요인들이 인력거를 관용으로 사용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어느 일본사람이 일본에서 10대를 수입, 서울 시내 및 서울과 인천 간에 운행하기도 했다. 초기의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으나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인력거 하면 어릴 적 읽었던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에 나오는 인력거꾼 주인공 김 첨지가 떠오른다. 자동차가 많지 않던 개화기에 택시대용으로 쓰였고 요즘도 개발도상국에선 교통수단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유럽, 미국 등에선 자전거와 연결한 인력거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이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았다. 인력거의 '재발견'인 셈이다.

정부의 칙령 '기생 인력거 금승령'

 인력거꾼은 관광명소 설명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는 여행 가이드이기도 하다.
인력거꾼은 관광명소 설명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는 여행 가이드이기도 하다. ⓒ 김종성

1900년으로 접어들자 마차보다 인력거가 도시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실용화되어 서울 장안을 많이 누비게 되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택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체 높은 왕자님들로부터 역적 이완용이나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즐겨 탔고, 상민이나 천대받던 보부상과 백정들도 돈만 주면 날렵하고 빠르고 편안한 인력거를 탈 수 있었는데 그 중 기생들이 인력거의 주요 고객이었단다.

술자리에 자주 불려 다니는 기녀들은 사회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서도 인력거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찻삯을 듬뿍듬뿍 후하게 주는 기녀들은 인력거꾼에게 더 없는 '봉'이요, 큰 고객이었다. 그런데 이 인력거를 돈 많은 한량들과 기생들이 독차지 하다시피 하여 인력거로 왕래하는 것이 기녀 사회의 풍조로 변했다. 그래서 요정 앞에는 항상 이들을 기다리는 인력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 장안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지방의 권번(券番 : 기생조합)들도 '기생은 이웃집 놀이에 갈 때도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왕래할 것'이라는 규칙을 만들어 인력거와 기녀들을 더욱 가깝게 했다. 이 때문에 '기생 인력거'라는 말이 나돌아 서민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후에는 학부 출신 인텔리 청년들도 일부러 인력거꾼이 되어 기녀와 로맨스를 심심찮게 뿌려 사회문제로 번져갔다.

어떤 사회이건 인기의 초점이 되거나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이에 반발하는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변해버린 기생 인력거를 장안의 백성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이 때문에 기생 인력거에 대한 민심의 반항을 감지한 조정에서는1904년 늦봄 '기생 인력거 금승령' 이라는 해괴한 칙령을 내렸다.

경성부사(지금의 서울시장)가 각 서에 훈령 하얐는 바… 기생은 특허를 득한 후에 인력거를 승거하되 양산을 필히 소지해 유표하여야 하느니라. -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1981)


이후 기생들이 사용한 양산 때문에 우리 여인네들 사이에 파라솔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온다.

서울 종로를 누비는 친한 친구 같은 인력거

 무더운 여름날씨에도 땀흘리며 달리는 젊은 라이더의 모습이 보기 좋다.
무더운 여름날씨에도 땀흘리며 달리는 젊은 라이더의 모습이 보기 좋다. ⓒ 김종성

더운 날씨에 3명까지 탈 수 있는 인력거를 이끄는 20대 초반 젊은 라이더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지만 표정은 밝아서 좋다.

손님을 태우고 달리는 인력거꾼들은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고 훈련받은 숙련된 라이더들이라고 한다. 잔근육이 새겨진 탄탄한 다리와 까맣게 탄 양팔뚝이 그 증거. 총 6대의 인력거 유지 보수도 직접 한다니 자전거 전문가가 다 됐겠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나는 뒷좌석보다는 앞에 있는 자전거에 올라타 달리고 싶어져, 앞에 타고 달릴 수 있는 이벤트 좀 해달라고 제안을 했더니 싱긋 웃으며 올 가을에 한번 하겠단다.

중국 베이징에서는 인력거꾼들이 나이가 좀 있는 아저씨들이라 그런지 무더운 여름날 인력거를 이용할 땐 좀 미안했는데, 아띠 인력거의 라이더는 모두 젊은이들이라 그런지 덜 미안할 것 같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마주쳤을 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거나, 이채로운 장소를 보면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다고 하니 골목 여행이 더욱 풍성해지겠다.

이렇게 인력거꾼은 달리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동네나 명소, 명물에 대한 설명을 하는 여행 가이드를 하기도 한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삼청동이나 인사동, 한옥마을을 지나갈 땐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어디서 인력거를 만들었나 물으니, 이런 인력거를 만드는 공장이 국내에는 없어 수소문 끝에 중국까지 찾아가 주문제작을 했다고 한다. 아띠인력거 SNS 사이트에 소개된 기사를 보니,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가서 힘들게 만들어 왔지만 처음에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다. 그러다 최근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하는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로는 관심을 보이는 매체들과 지자체들이 많이 생겼단다.

지난 4월엔 군산에서 열린 두레누리 축제에 참여해 지자체 행사에 처음으로 인력거를 선보였다(관련기사 : "인력거 타고 옛날 거리로 시간여행을..."). 앞으로 서울뿐만 아니라 경주, 부산, 전주, 대구 등에도 인력거가 돌아다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 또한 차보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인지 20대의 젊은이들이 언덕길 많은 동네에서 페달질을 하느라 땀을 흘리고, 직접 인력거를 수리하는 모습이 흐뭇하고 절로 맘속으로 응원을 보내게 된다.

인력거가 주로 다니는 길은 '역사탐방 코스'와 '로맨틱 코스' 두 가지가 있다. 이렇게 정해진 코스 외에도 택시처럼 순수한 교통편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알게된 청계천 옆 자전거도로를 알려주며 새 코스로 추가해 보라고 했더니 인력거꾼이 반색을 한다. 청계천변의 동묘벼룩시장에서 한강까지 자전거도로가 나 있는데 인력거의 새로운 코스로 태어났음 좋겠다. 정동길, 청와대 앞 길, 경복궁 영추문 앞 도로변 등에도 자전거도로가 생기면 인력거는 도시의 명물이 될 듯싶다.

서울 종로의 오래된 골목길을 누비는 정답고 친한 친구 같은 인력거는 매주 금, 토, 일에 운영을 하며, 미리 전화를 하여 장소와 시간을 예약하거나, 운좋게 현장에서 빈 인력거를 마주치면 바로 타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ㅇ 인력거 요금 및 이용안내 : www.facebook.com/arteein
ㅇ 서울시 온라인 뉴스에도 송고예정입니다.



#인력거#아띠 인력거#종로#북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