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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잘 먹지 않는다. 애교가 많던 아이가 묻는 말에 짧게 대답만 할 뿐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벌써 일주일째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할 뿐이다. 맘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얼마 전 주인집 딸하고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을 보고 "사이좋게 놀아야지, 왜 다퉈? 네가 먼저 양보해라!"라고 하며 딸아이를 나무란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거슬렸다.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은 다가구주택 2층이다. 지하에 대학생 세 명이 살고, 1층엔 60대 노부부가 산다. 3층엔 주인이 늦둥이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주인집 늦둥이는 둘째 딸아이와 같은 반 친구다. 이 집에 산 지는 4년째가 된다.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재계약을 해야 한다.

처음 이곳에 이사를 온 날 가족회의를 했다. "주인집에서도 집 살 때까지 오래도록 살라고 했다. 비록 집은 낡고 창문과 문짝이 뒤틀려서 잘 맞지 않지만 우리 네 식구 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라며 나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아이들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단칸방에 살다가 우리들 방이 생기니 진짜 좋아요. 여기서 우리들 결혼할 때까지 살아요!"라고 한술 더 뜬다. 셋방에서 이렇게 큰 행복을 얻은 것은 처음이었다.

몇 날 며칠을 달랜 끝에 둘째 딸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뭣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하니? 혹 주인집 딸과 싸울 때 널 나무라서 그런 거니?"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딸아이가 입을 열었다.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딸아이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왜?"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

"남친이 싫어졌어?"

"아니, 아빠 땜에!"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아빠 때문이라니? 그게 뭔 말이야?"

딸아이 말은 이랬다. 자기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같은 반 여자아이가 있었다고, 그게 바로 주인집 딸이라고. 주인집 딸이 자기한테 헤어지라 강요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종종 다퉜다고 했다. 근데 아빠는 그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보고 양보하라고 해서 서운했다고.

"그러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야지. 그냥 사소한 문제로 싸우는 줄 알았지. 아빠한테 말해지 그랬어? 아무렴 아빠는 네 편이지 않겠어?"

울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고작 주인집 딸하고 싸운 걸 나무랐다고, 그런 이유로 남자 친구와 헤어지다니. 게다가 그게 다 아빠 때문이라니. 세상에 말도 안 돼. 갑자기 딸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그럴 수가 없었어!"

"왜?"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 전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이야길 들었어."

"무슨 이야기?"

"수도세 이야기."

"여보, 주인집한테 좀 따져봐요. 수도세가 3만 원 조금 안 되게 나오다가 지금은 5만 원 가까이 나와. 특별히 물을 더 쓰는 것도 아닌데. 그거 알지? 장가 간 주인집 아들 부부하고 손자들이 여기서 같이 사는 거."

아내의 목소리에는 화가 가득 서려 있었다.

"잠깐 있는 것도 아니고 벌써 6개월은 된 것 같은데 그러면 아들 내외, 손자까지도 수도세 계산에 집어넣어서 n분의 1을 해야 될 것 아니야. 그리고 청구서도 보여달라고 해봐. 이 집에 와서 청구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진짜 얼마 나왔고, 정확하게 n분의 1 하는지도 모르겠어."

"여보, 주인아주머니하고 말해봤는데. 수도세가 전보다 많이 나와서 그러는데 청구서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조금 언성을 높이면서 의심하는 거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들 내외도 수도세 계산에 포함시켰냐고 물어보지 못했어. 아들 내외가 살던 곳이 재개발되었는데, 방을 구하지 못해서 방 구할 때까지 있는 거 같더라고. 우리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모른 척하자. 아이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 하잖아! 괜히 밉보여서 재계약 안 하면 우리만 힘들잖아."

딸아이는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주인집 딸의 비겁한 말에 딸아이는 남자 친구와 헤어져야 했다.

"야! 네가 헤어지지 않아도 우리 아버지가 재계약 해주지 않으면 넌 이사 가야 하고, 그러면 전학 가야 하니까. 자연히 헤어지게 돼 있어!"

이런 이야길 하면서 딸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뭇 밝은 표정이다. 슬픔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열네 살 꼬마가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졌다. 딸아이는 스파게티를 한 움큼 말아서 내게 주며 말했다.

"아빠 난 괜찮아! 나 결혼할 때까지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고현종은 하는 일마다 실패한 인생을 살다 운 좋게 결혼을 했다. 결혼해서도 10년간을 아내의 도움으로 근근이 풀칠했다. 마흔한 살에 노인복지 현장에 뛰어들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삶이 보이는 창#고현종#노년유니온#전셋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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