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학교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규율은 철저한 관리와 통제, 감시 시스템을 낳는다. 이 시스템은 마치 감옥의 그것과도 같다. 학생들을 잠재적인 '범법자'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학생들의 '일상'인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 공간을 떠올려 보라. 학생들은 그곳에서 교도관의 훈시를 듣는 '죄수'들처럼 단정한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한다. 죄수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엄격한 교도관의 이미지를 여전히 훌륭한 교사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학생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탓하는 교사들이 여전히 많은 까닭이다.
이런 공간에서 학생들이 주체적인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기 생각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자신만의 언어로 그 생각을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아이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교실 수업에서는 교사가 '질문 있니?'라고 물었을 때 손을 드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 교사가 그저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임을 학생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괜한 눈총을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질문 있니?'라는 교사의 물음에 학생들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도 교사들이 결코 난감해하지 않는 '기괴한' 풍경이 대한민국 교실에서는 무척 자연스럽다. 그래서 질문이 사라지고,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쓸 줄 모르는 학생들이 살아가는 교실과 학교 공간에서 학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는 '무뇌아'로 성장한다. 학생들은 규율이 강제하는 획일적이고 정형화한 행동 양식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노예'가 된다.
캐나다의 정치학자 마거릿 콘이 쓴 <래디컬 스페이스>는 공간과 변혁적인 정치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 담아 놓은 문제 의식은, 가령 학교라는 공간이 왜 학생들을 '무뇌아'나 '노예'로 만드는지, 그 결과 어떻게 해서 학생들은 사회에 나와 체제 순응적인 소시민이 되는지를 살피는 것과 흡사하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특정한 장소나 터전은 개인이 권력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양식이다. 거기에는 예의 학교를 포함하여 가정과 감옥과 공장 등이 두루 포함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하는 '변혁적 정치'의 공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활성화한 협동조합, 민중회관, 노동회의소 등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 공간은 부르주아 공론장이나 공장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민중을 위한 진정한 교류와 사교의 공간이었다. 이를 통해 이들 세 공간은 공장 바깥에 실재하는 저항의 터전이 되었다는 게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주된 논지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먼저 변혁적 정치의 가능성을 함축한 공간으로 부르주아 공론장과 공장을 살핀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일찍이 사회학자 하버마스가 구체화한 개념으로, 카페나 살롱, 비밀 협회와 같은 부르주아 지식인이 중심이 되는 공간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들 공간이 전제 정치에 대항하여 계몽사상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으나, 유산계급의 이해관계와 헤게모니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대안 개념으로, 일찍이 마르크스와 청년 그람시가 주목한 공장이라는 공간을 고찰한다. 마르크스와 청년 그람시는 공장을 착취의 공간인 동시에 저항의 터전으로 보았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자본가 계급에 의한 착취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계급 의식과 프롤레타리아 정체성을 획득하여 저항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공장은 노동자들이 저항의 터전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규율과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전방위적인 감시와 억압, 폭력이 일상화해 있고, 회사 경영자나 관리자들에 의한 노동자들의 회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저항과 변혁적인 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거대기업 삼성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업들에서 벌어지는 노조 탄압 사례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 부르주아 공론장과 공장 공간의 대안으로 협동조합과 민중회관, 노동회의소 등에 눈길을 준다. 원래 협동조합은 세계경제가 한 블록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경제 변화의 부정적인 결과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저자는 그런 협동조합이 운영한 카페와 편의점 등에서 동료들과 한잔 걸치는 행위가 그대로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인 동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가능성을 제공했다고 본다.
민중회관 또한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하고 조우할 수 있는 사무 공간인 동시에 야학과 독서회 등을 운영하는 노동자들의 문화 공간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민중회관이야말로 엄격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부르주아 클럽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전형이다. 또한 저자는 노동 상담소이자 연구소의 위상을 가지면서 노동자 상조회와 협동조합 등을 거르는 일종의 동맹체인 노동회의소도 부르주아의 상공회의소에 대한 민중적 대안 공간으로 그 의의가 각별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들 공간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과 의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저자에 의하면, 백악관이나 월스트리트와 같은 거대한 '주권 권력'의 터전들과, 그 터전들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는 기념비적인 상징 공간과 달리, 길거리에 뿌리줄기처럼 뻗어나간 구조물들이 있다. 저자는 이 구조물들의 권력을 '미시 권력'이라고 부른다.
미시 권력은 쉽사리 간과되지만, 그럼에도 정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미시 권력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 우리는 정치가 발생하는 다양한 장소들을 주시해야 한다. 축제와 광장, 노동회의소, 상조회, 조합회관, 야간학교, 협동조합, 민중회관 등이 그러한 장소들이다.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산출하는 국가 외부의 정치적 터전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장소들을 급진 민주주의 공간이라고 부를 것이다. (21쪽)'래디컬 스페이스(radical space)', 곧 '급진적 공간'이라는 제목의 의미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쯤에서 저자가 풀어놓은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자. '급진'은 흔히 '폭력'이나 '무법성', '극단', '체제 전복' 등의 '과격한' 어휘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원래 '급진적(radical)'이라는 단어는 '뿌리'를 뜻하는 '라디칼라스(radicalis)'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저자는 '급진 민주주의'를, '급진적'이라는 용어의 본디 의미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로서 보통 사람들의 권력을 의미한다고 규정한다.
저자는 또한 '급진 민주주의'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인 '멀리까지 도달하는'이라는 뜻에 주목하면서, 이 용어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범위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설정되는 이런저런 제한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이해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급진 민주주의 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투쟁을 연결하고, 좀 더 효과적인 정치 참여를 위한 새로운 터전을 창출하며, 기존의 주변화한 집단들을 의미 있게 포섭하기 위해 시민권에 대한 이해를 확대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촛불'과 '희망 버스'라는 두 개의 단어를 머릿속에 계속 떠올렸다. '촛불'로 대변되는 광장의 정치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300여 일 가까이 돼가는 '철탑 위'의 처절한 농성과, 그 농성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한 '희망 버스'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변혁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암담하고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하지만 '촛불'은 주류 언론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수 주째 꺼지지 않고 있다. '희망 버스'는, 이 뜨거운 폭염과 습한 기운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한 마음 한 뜻으로 불러 모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과 거대 야당은 '정쟁'이라는 말로 똘똘 뭉친 하나가 되어 사이 좋게(?) 싸우고 있다. 그 두 '골리앗' 정당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우리의 '급진적인(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촛불'들과 '희망 버스' 참가자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들 이름 없는 '다윗'이 있는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래디컬 스페이스> (마거릿 콘 지음, 장문석 옮김 | 삼천리 | 2013. 7. 5 | 336쪽 | 1만 8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