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물골 노부부 이야기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 물골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졌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지금은 쭈그렁탱이 할망구지만, 그땐 참 고왔지").
이번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물골에 다녀왔지만, 할아버지는 뵐 수가 없었다. 몸이 아파 원주 시내에 있는 큰아들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골 할머니는 밭에서 단 옥수수를 한 바구니 내어주시며 삶아 먹으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봄에 심은 옥수수일 터이다. 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한 날, 덕분에 할아버지를 뵙고 올 수 있겠다며 미리 끓여놓은 개밥을 내일 아침에 나눠주고 서울로 올라가면 고맙겠다고 하셨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옥수수밭에서 옥수수도 따가라고 하셨다.
물골 노부부를 알고 지낸 것은 30년이 넘었다. 매 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찾아뵙고 지내는 사이였고, 지난해 가을에는 <한겨레>에서 창간 준비 중이었던 월간지 <나들>에 들어갈 기사 취재차 방문을 하기도 했었다. '물골 노부부'라는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소개하면서, 여기저기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왔고, 물골 노부부는 처음에는 즐거워하다가 이내 귀찮아서 이젠 취재에 응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게 몇 해 전이다. 그 이후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빌미로 간혹 가서 그분들의 사진을 담고는 했다. 지난해 가을엔 느닷없이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양복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오신 물골 노부부를 사진에 담고, 각기 영정사진을 찍어 액자로 만들어 보내주었다.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곳에서의 1박 2일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 옥수수를 따오지는 못했다. 할아버지가 아파 누워계신데 땀 한 방울 보태지도 않고 열매만 따 먹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옥수수를 조금 따갈까요?" 전화했다가 "생각없다"며 혼쭐난 것이 더 큰 작용을 했을 터이다.
집으로 돌아오고 이틀 뒤 할아버지의 부음 소식이 들려왔다. 원주에 있는 작은 병원의 장례식장, 여름 휴가철과 주말이 맞물리면서 두 시간이면 갈 거리를 다섯 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장례식장에는 내가 지난 가을 찍어드린 영정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었다니, 혹시 할아버지는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주신 옥수수 중에서 남은 것 몇 자루를 삶았다. 지난 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구슬땀을 흘리며 심은 옥수수일 터이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심은 옥수수를 먹지도 못하고 이 세상과 이별하셨다. 그리고 이젠 망자가 된 할아버지가 심었던 옥수수를 내가 몸에 모시고 있다. 망자의 손길이 스민 옥수수를 먹으면서 그간의 물골에 대한 추억들을 돌이켜 본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단편들 대부분은 시골 촌부의 일상이다. 딱히 두드러질 것도 없는 그런 것들이 추억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할머니는 홀로 그곳에서 살아가실 수 있을까? 당분간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곳에는 노부부가 키우던 백구 두 마리 외에는 친구 해줄 벗이 없다. 그리고 밭일도 고되고, 노구의 몸으로 홀로 농사를 짓기에는 할머니도 너무 연세가 많으시다.
올해 지은 농사는 어찌어찌 자식들이 거둘 것이다. 옥수수를 위시해서 고추며, 백태, 들깨, 벼 타작까지 끝나면 내년엔 봄이 와도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농사일에 단련되었더라도 할머니 혼자서는 고작해야 텃밭 정도를 가꾸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 산소가 그곳에 있으니 묘지를 돌보며 그곳에 살겠노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물골의 밤은 너무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너무도 덤덤한 나 자신이 놀랍다. 그간의 정을 생각하면 장례식에 참석해야 마땅할 터인데도 그저 장례식장에 들른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인연의 끈도 다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죽음은 나와 물골을 갈라놓는다. 그분들이 없는 물골을 찾을 이유가 여전히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너무 차가운 나를 보지만, 그게 나의 한계다.
그분들의 이야기가 실린 가사를 출력해서 가져다 드렸을 때, 이름 석 자와 사진이 활자화된 것이 처음이라며 신기해하시던 물골 노부부. 방송을 통해서 자신들의 얼굴을 보면서 신기해하시던 물골 노부부. 그들의 일상이 왜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것인지 그분들은 잘 몰랐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제 그 소용이 다했으므로 인연의 끈이 다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나의 차가움이 스스로 무섭게 느껴진다.
오늘은 장맛비가 내릴 것이라 했는데, 다행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장례식도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장맛비라도 추적거리며 내렸더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마예고에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그 할아버지의 복일 터이다. 가을이 오기 전, 물골을 한 번은 더 찾아갈 것이다. 할아버지의 무덤에 소주라도 한 잔 부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이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옥수수가 쇠기 전에 와서 따가라고 하신다. 혼자서는 거둘 수도 없고, 버리게 생겼으니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오라는 것이다. 차마, "예"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무명씨 한 분이 지난주 세상과 이별을 하고 오늘 장례식을 치렀다.
무덤에 묻힌 망자가 심었던 옥수수는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서 나의 일부를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죽음과 삶의 경계도 모호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일 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네 삶과 이어져 있다.
귀한 인연이었다. 그분의 삶 양식이 딱히 내 삶의 본보기는 아니었음에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셨던 분, 어떤 철학이나 의식은 없었지만, 몸에 배어 있었던 분,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셨던 무명씨 한 분과의 인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