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자 100만 명 이상이 '0시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논란이다. 0시간 계약직이란, 일주일 혹은 한 달에 몇 시간을 근무하는지 정해져 있는 파트타임과 달리 최소한의 노동시간이 보장돼 있지 않은 일자리를 말한다. 0시간 계약직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이 필요로 할 때 일하고 이에 따라 시급을 받는다.
카렌은 25년간 성인 돌봄 노동자로 일해 왔다. 주로 치매가 있는 노인들이 돌봄 대상이다. 그녀는 그동안 한 달 내내 일하면서 풀타임 급여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사는 곳의 지역 의회가 새로운 회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그녀와 동료들은 '0시간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그녀는 BBC와 한 인터뷰에서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꼭 괴롭히는 것 같아요. 오전 6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오전 11시 30분까지 일하고는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고용주들은 더 이상 제게 전화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가치가 없으니까." 영국 맥도날드, 10명 중 9명 '0시간 계약직'
영국 인력개발연구소(CIPD)는 5일(현지시간) 충격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카렌과 같은 0시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 전체 노동시장의 4%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번 결과는 영국 내 1000개 회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토대로 추산한 것이다.
이번 조사 결과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정부 통계와의 간극 때문이다. 영국 통계청(ONI)은 2012년 기준 0시간 계약직의 수가 25만 명이라고 밝혔다. 인력개발연구소의 조사와 4배나 차이가 난다. 통계청은 조사에 오차가 있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내년 봄 다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0시간 계약직 문제는 지난 7월 30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영국 왕실에서 여름철 버킹검 궁전 개방 기간에 일할 임시직 350명을 모두 0시간 계약직으로 채용했다고 보도하면서 최근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5일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에서 가장 많은 직원을 0시간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있는 회사는 세계 최대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다. 영국 내에서 1200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맥도날드는 9만 2000명의 직원 중 90%인 8만 2800명을 0시간 계약직으로 고용했다. 맥도날드 영국 본사 대변인은 "많은 직원들이 학부모거나 학생들이기 때문에 아이를 돌보거나 공부를 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유연한 일을 찾는다"고 말했다. 맥도날드 측은 "노동시간은 사전에 공지된다"면서 "트레이닝, 생명 보험, 직원 할인 등의 혜택도 동일하게 받는다"고 덧붙였다. 맥도날드는 영국에 들어오던 1974년부터 0시간 계약직을 채용해 왔다.
"유연한 노동" Vs. "불안정 노동" '노동유연성'은 0시간 계약직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다. 맥도날드 측이 밝힌 것처럼 최소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일에 얽매이지 않고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도 이는 이점이다.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하는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는 매 계절마다 0시간 계약직을 채용한다. 내셔널 트러스트 측은 "우리 일은 계절을 많이 타기 때문에 0시간 계약직이 우리 기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0시간 계약직이 가져온 유연성이 경기침체 속에서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기적 근무 일·안정적 수입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불안정 노동'을 낳는다. 0시간 계약직들은 휴일이 정해져 있지 않고 병가 중 급여도 받지 못한다. 다른 곳에서 추가로 일을 하려면 기존 고용주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16~24세 젊은이들이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0시간 계약을 맺은 16~24세 노동자의 수는 2008년 3만 5000명에서 2012년 7만 6000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25세 이하 노동자 3명 중 1명이 0시간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이다. 주로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 푸드점이나 판매업이 많다.
에섹스에 있는 '퍼스트 에너지'에서 일하는 한 18세 노동자는 BBC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계약직으로) 전환을 거부하면, 그들은 매주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고 말했다. 영국공공서비스노조(UNISON)의 데이비드 프렌티스 사무총장은 "0시간 계약직이 일부에게는 유연성을 줄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계약직에 있는 대다수는 선택권이 없다"고 지적했다.
경력이 있는 이들에게도 불안정한 수입은 공포다. 50대의 팻은 '펠 앤 베일스'라는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자선단체의 기부를 요청하는 전화를 돌리는 일을 했다. 그런데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회사는 직원들을 0시간 계약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의 업무가 갑자기 취소될 수 있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몇 주를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주인이 제게 집세를 내라고 소리 지를지도 몰라요. 냉장고는 빌 것이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야 할 거예요. 잠은 소파에서 자죠.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그래요." 산업부 장관 "법적으로 재검토" CIPD의 보고서가 논란이 되자, 빈스 케이블 산업부 장관은 이러한 0시간 계약직이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다며 법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케이블 장관은 "0시간 계약직과 고용주 사이 독점적 관계 때문에 안정적인 일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다른 회사로 가는 것도 막는다"면서 이러한 독점을 해소하기 위한 법안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처카 움너 노동당 예비내각 산업부 장관은 "0시간 계약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그들이 충분한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의 아이들을 위한 식탁에 음식을 올릴 수 있을지 매주 걱정하게 만든다"면서 "너무 많은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0시간 계약의 덫에 걸려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당 일부와 노조에서는 이참에 0시 계약직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0시간 계약이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하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