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신이 하는 일이야…, 황제폐하의 밀명을 받아 시간이 날 때 틈틈이 고려의 강산을 살피고 다닙니다. 제가 풍수를 좀 알아서,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고려의 혈맥을 찾는 일을 합니다. 고려의 정기가 흐르는 곳으로 판단되면 그 맥을 끊기 위해서 산과 들판에 철심을 박거나 못질을 하고 있습니다.""못질 말이오?""예! 그렇습니다. 혈을 끊고 맥을 누르려면 혈점엔 칼질을 해야 하고 맥점엔 못질을 해야 합니다. 침을 놓아서 기와 혈을 제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노윤적이 진지한 눈빛을 보내자 호종단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있는 목소리였다."몇 달 전에는 옛 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난랑비를 찾아 없애버렸습니다."- <최후의 결전>에서고려의 정기가 흐르는 곳으로 판단되면 그 맥을 끊기 위해서 철심을 박거나 못질을 한다? 무심코 조선 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전국의 산하를 샅샅이 살피고 돌며 철심을 박고 못질을 한 일본의 행위로 읽기 쉽다. 그런데 이는 인종(고려 17대 왕 1109년~1146년, 재위 : 1122년~1146년) 때의 사정이다.
고려 제17대 왕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난(1135년)'을 재구성한 소설 <최후의 결전>(역사의아침 펴냄)은 송나라 사신 노윤적과 부묵경, 호종단, 임완 등의 행보로 시작된다.
노윤적은 송나라 황제의 사신으로 1년 전에 훙거(薨去)한 고려 16대왕 예종을 조문함과 아울러 예종의 뒤를 이은 인종을 알현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호종단과 임완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했다. 그런데 겉으로는 고려가 좋아 고향과 처자식을 버리고 고려로 귀화했으나 실은 송나라 황제의 이와 같은 밀명들을 수행하고자 거짓 귀화한 것. 호종단이 그간의 행적을 노윤적을 통해 송나라의 황제에게 보고하고자 일행에 따라 붙은 것이었다.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1대사건"... 소설로 재구성된 '묘청의 난'소설은 이 '수상한 방문객들'의 이야기에 이어 15세에 왕위에 오른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이 인종과 고려를 좌지우지, 왕좌를 차지하려는 와중에 이자겸과 뜻을 같이하는 척준경이 고려의 궁궐을 방화해 모두 잿더미가 되나 독살의 위험에까지 처한 인종을 위해 척준경을 이용해 이자겸을 제거, 이에 더욱 탄탄해지는 김부식의 권력, 이런 김부식으로부터 왕권과 고려를 지키려는 정지상과 묘청의 만남 등을 긴박하게 들려준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인종 재위 당시 송나라는 위세가 나날이 높아지는 금나라에 위협을 느껴 고려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와 은밀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 송나라의 목적은 고려의 혼란과 적절한 이용이었다. 그리하여 호종단이나 임완 등을 고려에 거짓 귀화시켜 조선의 맥을 끊는다거나 중요한 문서나 서적 등을 빼돌리는 밀명을 수행하게 하는 한편 고려나 김부식 같은 고려의 특권층들과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그럼에도 신라 출신인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이런 송나라를 향한 맹목적인 사대로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과 종종 부딪히곤 한다. 와중에 고려에 떠오르는 인물은 서경(평양) 출신의 정지상(~1135년).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한 정지상은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 조정을 쥐고 흔드는 김부식 일파로부터 왕권의 위협을 느낀다. 그리하여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들과 왕권회복과 고려의 미래를 위해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제의한다.
묘청이나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가 천도지로 서경을 선택한 이유는 고구려의 정기 등 우리 민족혼이 살아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종도 뜻을 같이한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가 득세하는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함으로써 새로운 국치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개경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인종은 서경성 임원역에 완공된 새로운 궁궐인 대화궁으로 향하던 중 "현실을 즉시하라"는 김부식의 말을 거부하지 못해 서경 천도를 무산시킴으로써 묘청의 반란에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최후의 결전>은 단재 신채호(1880~1836년)가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1대사건"이라며 크게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이 사건의 승자가 바뀌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통탄한, 일부 사람들이 '유학이 중시한 문자 학문에 대항한 자연과학 학문운동이기도 하며, 중국을 맹목적으로 우대하는 사대파에 대항한 자주파의 저항, 복종과 굴욕에서 벗어나 민족정기를 세우고, 옛 조선의 영광을 재현하려했던 항거'라고도 하는 등, 오랜 동안 재평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온 '묘청의 난'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나에겐 1980년의 광주와 1135년의 서경성이 겹쳐 보인다""얘야! 이곳에서 군인들이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게 정말 사실이냐?""그럼요! 군인들이 칼로 죽은 여자의 가슴도 도려냈는걸요!"이 끔찍한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슷한 일이 900년 전에도 있었다. 1135년 서경성(지금의 평양)에서 신라 출신이 중심이 되어 모인 개경파들이 수도를 옮겨 개혁을 꿈꾼 서경파와 서경 사람들을 무참히 도륙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서경성에 갇힌 사람들은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채, 2년 동안 개경파에게 저항하다가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나에겐 1980년의 광주와 1135년의 서경성이 겹쳐 보인다. 두 사건 모두 특정지역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했고, 사건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두 사건의 승자는 정국의 1인자로 떠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이후 시대적 변화와 함께 역사의 방향도 달라졌다. <고려사>에서는 900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묘청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묘청을 비롯한 악의 무리가 백성들을 선동해 망령된 '칭제건원'을 내세우면서 서경성을 근거로 고려 왕권에 반역한 사건이라고 전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항거한 서경사람에게는 '서경역적'이란 글씨를 이마에 새겨 귀양 보낼 정도였다.- <최후의 결전> '작가의 말'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두고 누구는 '반란'이라 하고, 누구는 '민주화운동'이라고 하고, 혹자들은 '광주사태', 혹자들은 '광주항쟁' 등으로도 부르던 1983년 어느 여름날 새벽. 소문으로만 무성한 '광주의 봄' 그 진실이 무엇인지 몰라 혼돈스러워 무작정 광주로 향했다는 작가는 광주역에서 만난 한 소년으로부터 광주의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 '우영수'는 |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 박사다. 역사를 시작으로 철학·과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 잘못 알려지고 잘못 인식되고 있는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싶은 작은 소망이 생겨 팩션 형식의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열망으로 백제 멸망과 일본 건국의 비밀을 밝힌 <태양의 제국 1·2권>(판테온하우스 .2011년)을 썼다.
이번 소설 <최후의 결전>을 통해 '묘청의 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길 바라고 있단다. 과거와 미래가 시공으로 얽혀 있음을 확신하며 어느 곳, 어느 시간이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과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하길 희망한다고.(저자 프로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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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야 비로소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정식 명칭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등이 열려 그 진실이 드러난 광주의 비극이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때였다.
작가는 광주의 진실을 확인하면서 우리에게 '풍수지리에 능한 승려 묘청이 백성들을 선동해 일으킨 반란' 정도로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오랜 동안 재평가 논란이 있어온 '묘청의 난' 그 진실을 묻게 된다.
만일 <고려사>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어떠할까. '묘청의 난'에서 승자가 된 자는 여러 가지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줄임) 이런 이유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집필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가 죽은 후 자신을 두둔해줄 역사적 근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라는 체면이 있었으니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에, 적당히 진실을 비켜나가거나 회피한, 사실을 비틀고 덧칠해 외면한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과 옛일에 대한 기억을 혼미하게 만들어, 우리의 앞날을 미궁 속에 빠지게 한 역사가 고스란히 <삼국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최후의 결전> '작가의 말'에서 소설은 묘청의 난 이후 권세가 더욱 막강해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 호종단이 전국의 산하를 샅샅이 헤집고 다니며 조선의 혈맥들을 훼손하는 행위를 눈감아버리고 기록조차 하지 않는다거나, <삼국사기>에 옛 조선의 영토를 대륙에서 삭제하고 한반도에만 국한시킨다든지,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를 잇는 부여의 역사를 누락시키고, 발해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 등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한탄으로 끝난다.
단재 신채호가 "만약 이 사건의 승자가 바뀌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통탄해 마지 않았다는 '묘청의 난'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진실은 어디까지이며, 김부식은 무엇을 위해 살았나? 464쪽짜리 이 소설은 조선의 역사에 비해 뚜렷하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조선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지난 역사, 그 진실에 가깝게 가는 데 힌트가 되어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최후의 결전> | 우영수 | 역사의아침| 2013-05-20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