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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 전투부대로 군수물자를 나르고자 동원된 지게꾼 노무자들(1951. 2. 4.).
 고지 전투부대로 군수물자를 나르고자 동원된 지게꾼 노무자들(1951. 2. 4.).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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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불

방 안에서 할머니가 두 사람의 몰골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실례합니다. 하룻밤 쉬어가고 싶습니다."
"……."
"서울 가는 피난민인데 아직 열차가 다니지 않아서…."
"……."

"할머니,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어짜겠노(어떻게 하나)? 방이 없다. 다른 집에 가봐라."

할머니는 매섭게 방문을 닫으려 했다. 순희는 그 순간 잽싸게 비상금을 꺼내 얼른 할머니 손에 쥐어드렸다.

"얼마 안 됩니다. 부엌이라도 괜찮아요."

할머니는 등잔불에 돈을 모두 확인한 뒤 얼른 고쟁이주머니에 넣은 뒤 말했다.

"내 보니까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정지(부엌)에 재울 수는 없지. 그만 이 방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 나하고 손자뿐이다."
"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순희와 준기는 거듭 고개를 숙였다.

"어이 들어온나."

순희와 준기는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개도 물고 가지 않는 돈

순희는 별남 할머니가 "개도 물고 가지 않는 돈이지만 사람 세상에는 젤로 요긴하다"고 하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돈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면 굳게 닫힌 문도 활짝 열린다"고 말씀하신 어머니 말도. 그러는 동안 잠자던 손자도 일어났다. 초등학교 상급생으로 보였다.

"내가 본께로(보니까) 두 사람 다 마이 시장한 모양이다. 배고프제?"

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할머니가 부엌에 나가 상을 차려 왔다.

"난리중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명색이 추석날이라 명절 음식이 쪼매(조금) 남아있다. 요기나 해라."
"고맙습니다."

할머니가 내준 밥상에는 토란국과 송편 등 한가위 명절 음식이 몇 가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아귀처럼 후딱 상을 비웠다.

"맛있게 잡숫는 걸 보니까 내 보기 좋다.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지. 마이 고단한 모양인데 그만 자라."

할머니는 방 바깥쪽을 양보한 뒤 손자와 방문 안쪽에 누웠다. 방바닥이 따끈했다. 그동안 순희는 추위에 몸을 움츠려 떨었고 음식을 먹은 뒤라 식곤증으로 금세 눈을 감았다. 이따금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준기는 옆자리에 누운 소년에게 연필과 종이 한 장을 얻은 뒤 등잔불을 옮겨놓았다.

"잠시 후 불을 끄고 자겠습네다. 걱정 마시라요."
"마, 그라이소."

지게를 진 한 농사꾼이 미군 헬리콥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어떻게 비쳤을까.
 지게를 진 한 농사꾼이 미군 헬리콥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어떻게 비쳤을까.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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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편지

준기는 호롱불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두 사람이 서울까지 검문에 걸리지 않고 무사하게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준기로서는 서울까지 간다고 해도 문제다. 고향 평안북도 영변까지는 더 첩첩산중이다. 어쩌다가 자기와 순희는 인민군에게도, 국군에게도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 난리 중에 두 사람이 검문에 걸리지 않고 각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더욱이 여자보다 남자는 검문이 더 심하고, 밥을 얻어먹거나 잠잘 곳을 얻기도 더 어렵다. 이제부터 자기는 순희에게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그들이 지금 당장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일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 모두 여태 학생이다. 더욱이 자기와 순희 집은 서울과 평안도 영변이다. 앞으로 38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낙동강 전선에서 여기까지 서로 의지하며 도망쳐 온 것만도 하늘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진정으로 순희를 위한다면 자기가 순희의 짐이 되지 않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게 참다운 사랑이요, 후일 다시 만날 수 있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준기는 이를 악물고 백지 위에 작별 편지를 썼다.

순희 누이에게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바뀌는 전쟁터에서 순희 누이를 뜻밖에 만나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제 내레 순희 누이 곁을 떠나는 게 진정 사랑하는 길로 여겨집니다. 내레 앞으로 순희 누이가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날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납시다"고 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면서, 언젠가 대한문에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순희 누이는 부디 무사히 부모님 품으로 꼭 돌아가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아울러 우리가 다시 만날 인연도 이어지기를 간절히 빌면서 오늘 내레 누이 곁을 떠납니다. 내레 지금 순희 누이에게 줄 수 있는 나의 가장 귀한 선물은 당신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순희 누이, 아무쪼록 서울 집까지 잘 가십시오.
9월 27일 동생 준기 올림

준기의 눈자위는 눈물로 온통 젖었다. 그는 편지를 접어 쌀자루에 넣고 등잔불을 윗목으로 밀친 뒤 껐다. 그리고 곁에 누운 순희를 꼭 안았다. 순희는 그때까지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이따금 끙끙거렸다. 준기는 순희에게 작별의 키스를 가볍게 남긴 뒤 조용히 추풍령 외딴집 마당으로 나갔다. 보름 달빛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준기는 신발 끈을 바짝 조이고는 그 길로 추풍령 외딴집을 떠났다.

오늘의 경부선 추풍령 역. 지난날 한국전쟁의 흔적은 겉으로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의 경부선 추풍령 역. 지난날 한국전쟁의 흔적은 겉으로 찾아볼 수가 없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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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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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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